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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묘 이야기

묘 이야기 회묘

제10대 연산군 사친 폐비 윤씨 회묘(懷墓)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묘의 형식 :
단분
묘의 조성 :
1482년(성종 13), 1497년(연산 3), 1504년(연산 10), 1969년
묘의 구성

회묘는 조선 9대 성종의 폐비이자 10대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 윤씨의 묘이다. 회묘는 연산군 즉위 후 1504년(연산 10)에 회릉(懷陵)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형식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맞게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묘의 역사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가 사사되자 처음에는 일반묘로 조성하고, 1489년(성종 20)에 성종은 특별히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된 연산군은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1497년(연산 3)에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던 묘소를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하고 묘호를 회묘(懷墓)라 하였다. 이후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존하여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 능호를 회릉(懷陵)이라 하고 상설을 왕릉의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을 다시 회묘로 격하하였으며, 1969년에 묘소를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 이야기

폐비 윤씨(재세 : 1455년 음력 윤6월 1일 ~ 1482년 음력 8월 16일)는 본관이 함안인 함안부원군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신씨의 딸로 1455년(단종 3)에 태어났다. 1473년(성종 4)에 성종의 후궁 숙의(淑儀)로 간택되었다가, 이듬해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성종 7)에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가 된 후에 다른 후궁들을 투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1477년(성종 8)에는 중궁전에 비상(砒霜)과 주술서책이 발견되어 원자(연산군)와 성종에게 해가 끼칠 위험성이 있다 하여 폐위 될 뻔 하였으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이후 1479년(성종 10)에 투기의 죄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성종과 인수대비의 분노를 사 폐위되었다. 여기에 성종의 두 후궁 엄씨와 정씨의 모함이 더해져 1482년(성종 13)에 사사되었다. 성종은 연산군을 생각하여 1489년(성종 20)에 ‘윤씨지묘’라는 묘비와 2명의 묘지기를 두게 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誌文)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고, 윤씨를 위하여 제사를 허락하였으며,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가 발생되면서 왕후로 추존되어 시호를 제헌왕후(齊獻王后)라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모든 칭호가 삭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