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시고, 능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생략하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석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침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향로와 어로는 유실되어있는 상태이다. 본래 정자각은 세조의 능역 앞에 있었으나, 정희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두 능의 사이로 옮겨 지은 것이다.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주엽산(지금의 죽엽산) 아래에 광릉을 조성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하는 일부 풍수가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후 1483년(성종 14)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세조(재세 : 1417년 음력 9월 29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 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에 진평대군에 책봉되었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또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이 즉위 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 즉위 후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자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상왕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1468년(예종 즉위)에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에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선왕이 후사에 대한 유명이 없을 경우에는 그 권한은 대비가 하게 되어 있었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일찍 죽은 첫째아들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그 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483년(성종 14)에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선조 대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수양대군의 부인으로 간택되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계유정난 당시에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