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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태릉·강릉 관람정보

태릉·강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왕의 잦은 능행에 따르는 백성들의 고달픔 - 『광해군일기』 1611년(광해군 3) 8월 29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올해의 풍(風), 수(水), 황(蝗) 세 가지 재해는 근고에 없던 바이므로, 비록 진대(賑貸)하고 무휼(撫恤)하더라도 민생을 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스러운 판국인데, 이미 성릉(成陵)의 행행을 겪은 데다 또 계속해서 건원릉(建元陵)의 친제가 있습니다.

광해군일기 1611년(광해군3) 8월29일조 왕이 여러 능에 행차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사간원의 청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성상께서 돌아가신 선왕을 그리는 지극한 정에서 나온 일이기는 해도 바야흐로 수확하는 때에 기전의 민정(民丁)이 응역(應役)에 분주하고 각도의 인부와 말이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게 되면 원망하고 고달파하는 정상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강릉(康陵), 태릉(泰陵)에 친제를 하시겠다는 명이 또 오늘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고달픔에 대해서는 고려할 것이 없다손치더라도, 옥체가 친히 안개와 이슬을 범하면서 한 달 사이에 세 번을 행행하는 것은 몹시 미안한 일입니다. 강릉, 태릉의 친제는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능에 배알하는 일은 근대의 능침을 불가불 서둘러 전알(展謁)해야 되는 데다 도로 또한 멀지 않으니, 어찌 후일을 기다리겠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릉의 조성, 관리, 왕의 능행에는 대대적인 인력이 동원되었다. 능 주변의 8km 둘레로는 능 바깥의 불길이 능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하는 화소 구역을 만들었으며, 왕릉 인근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역의 의무를 지어 능 수호군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대부분 이들에게는 보상이 따랐으나, 잦은 임금의 능행이나 막중한 능역 공사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