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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홍릉·유릉 학술이야기

홍릉·유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순종의 장례를 주관한 이왕직 장관 민영기 - 『순종실록부록』 1926년 5월 5일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본직(本職)장관(長官) 남작(男爵) 민영기(閔泳綺)가 오늘 인산 및 천릉(遷陵)할 때에 각 항의 길일을 회의하여 택일하였는데, 유릉(裕陵)에 풀을 베고 흙을 파헤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날을 5월 7일 오후 2시로 하고, 개금정(開金井)은 5월 18일 오전 10시로 하고, 발인(發靷)은 6월 10일 오전 8시로, 임금의 하현궁(下玄宮)은 6월 11일 오후 10시로, 천릉하였다고 구릉(舊陵)에 계(啓)를 올리는 것은 5월 21일 오전 8시로, 발인은 6월 4일 오전 6시로, 하현궁은 6월 5일 오전 6시로 한다고 입계(入啓)하였다.

순종의 옥체를 모시고 궁을 떠나 능으로 가는 행렬이다. 일본군이 호위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이혜원

선왕이 승하하면 국장 절차 중 하나로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즉위식이 치러지며, 새로운 왕은 선왕의 장례 일체에 관한 사항을 지시하고 결정한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 왕실 관련 업무를 맡기기 위해 개설한 관청 이왕직의 장관 민영기가 순종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민영기(閔泳綺, 1858~1927)

구한말의 척신이다. 1879년(고종 16) 무과에 급제, 1883년 운봉현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92년 충주목사, 이듬해 상주목사를 지내고, 갑오개혁 뒤 일본에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898년 군부대신에 올라 수구파(守舊派)의 거물로서 황국협회를 조직, 보부상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하였다. 1899년 농상공부대신이 되고, 안경수사건(安?壽事件)으로 고군산(古群山)에 유배되었다. 1902년 특별 방면 되고, 1905년(광무 9) 탁지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였다. 국권피탈 뒤 일본 정부의 남작(男爵)이 되고, 동양척식회사 부총재, 이왕직장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