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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김포장릉 학술이야기

장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추존왕 원종의 태묘 합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유배 보낸 것에 대한 정언의 상소 - 『인조실록』 1634년(인조 12) 8월 2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은 정온의 상소를 싣고 있다.

“『예기』에 ‘ 아버지를 여의고 갑자기 존귀해졌을 때 아버지를 위하여 시호를 짓지 않는다.’ 하였고, 선유(先儒) 여중(呂中)은 ‘ 아버지의 벼슬이 낮을 경우 자신의 벼슬을 기준으로 시호를 지으면 안되고 그 당사자에게 합당한 시호를 만들어야 하니, 이는 자신의 벼슬로써 그 아버지에게 가할 경우 높이려 했으나 도리어 낮추는 꼴이 되어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가 못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전하께서 시호를 추증하는 일도 이미 지당한 도리가 못되는데, 곧장 열성(列聖)의 지위에 올리려 하신다면 그것은 예경(禮經)의 본의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중략)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일이 과연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삼사는 이목을 맡은 관직인데 거의 다 쫓아내었고, 정원은 후설(喉舌)을 맡은 자리인데 오래 전에 가두어 버렸으며, 대신은 고굉(股肱)을 맡은 직책인데 내팽개치듯이 버렸습니다. 바르게 논하는 자들을 근거 없는 논의를 한다 하고, 아첨하여 영합하는 자들을 정직하다 하여, 시비가 전도되고 사정(邪正)이 구분되지 않고 있으니, 이른바 ‘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행실이 자취를 감추고 아첨과 간사함이 풍미하고 있다.’는 상황과 불행히도 가깝다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선뜻 깨닫고 서슴없이 길을 바꾸어 예경(禮經)의 지극한 가르침을 따르고 역대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 속히 예에 맞지 않는 예를 중지시키고 유배하라고 한 명을 거두어 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안에 두고 답하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태묘(太廟)에 합제(合祭)하려고 하자, 여러 언관들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이들을 유배보냈다. 정언은 이러한 인조의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 위와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정온(鄭蘊, 1569 ~ 1641)

조선 중기 문신이다. 『덕변록』과 『망북두시』, 『망백운가』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하였고, 인조반정으로 석방,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 · 이조참의 · 대사간 · 경상도 관찰사 ·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추존왕 원종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 영녕전의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