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영역

조선왕릉

융릉·건릉 학술이야기

화성 행궁 이야기

정조의 임시 처소로 건립된 행궁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장조의 능인 현륭원(顯隆園, 융릉)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장조의 원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이라 하였다.

대대적인 확장을 거듭한 화성 행궁

화성 행궁은 1789년(정조 13) 장남헌(壯南軒 : 봉수당의 옛이름)을 중심으로 그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790년(정조 14) 5월에 약 360여 칸의 건물들이 완성되었다. 1794년(정조 18)부터 화성 성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화성 행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1795년(정조 19)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맞추어 주요한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62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조성되었다. 또한 화성 행궁정리수성향곡(華成行宮整理修成鄕穀)이라는 별도의 제도를 두어 관리, 운영하게 하였다.

수원성 팔달문의 지붕 화성 행궁을 감싸고 있는 수원성곽의 팔달문이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특별한 포부

화성 행궁은 여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경복궁 다음가는 궁이라 할 정도의 규모와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현륭원(융릉) 천장 이후 11년 간 12차에 걸쳐 화성에 행차할 만큼 정조의 능행이 정례화 되었고 이때마다 화성 행궁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성이 정조의 특별한 포부를 담은 도시였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강력한 왕권 구축과 개혁을 향한 의지

화성 신도시 건설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장조의 원을 원래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이전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화성 신도시 건설은 서울 남쪽의 교통 요지에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왕권의 배후 도시로 삼고자 하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사업으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조는 세자가 15세가 되는 해에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화성에 머물려고 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각종 문헌에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 행궁에 남겨진 미완의 계획들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화성과 행궁에 대한 정조의 계획들은 모두 미완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1801년(순조 1) 행궁 옆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이 건립되었고, 이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현륭원(융릉)과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에 전배하고 화령전에 참배하는 원행(園行)을 계속하면서 화성 행궁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행궁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