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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융릉·건릉 학술이야기

정조의 화성행차 이야기

비극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임금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으로서 위대한 임금으로 칭송 받는 인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1776년(정조 1)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당쟁의 와중에서 어렵게 25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하여,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화성 행차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 장조의 원을 화산(花山)으로 천장한 후 원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으며,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아버지의 원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때마다 화성에 머물며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고, 한 차례의 행차마다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였다.

8일간의 화성 행차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 8일간의 화성행차를 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9일 아침 화성 행차에 나섰다. 1km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하여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 행차를 위해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되었는데,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척후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1795년 8일간의 화성행차의 과정을 그린 8폭 병풍 중 화성에 도착하여 향교에서 성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다.(호암미술관 소장.)

화성에서 치러진 화려한 회갑연

이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조선시대 왕실 행사 중 가장 크고 화려했던 행사로 궁중 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회갑 잔치는 오전 9시 45분부터 화성 행궁의 주 건물인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 홍씨의 내외친척들도 초대됐다.
내빈이 13명이었고, 외빈이 69명이었다. 정조와 신하들은 차례로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에게 술잔을 올리며 천세를 불러 축하했고, 그 때마다 음악과 정재(呈才)가 공연됐다. 한양과 화성유수부 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들이 다양한 궁중무용을 추었다.

화성 행차를 통해 보인 개혁 의지

그런데 정조는 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열려고 했을까? 그리고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탄 채 행렬을 이끄는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날 정조의 화성 행차는 실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렬이었다. 행렬에 동원된 3,000여 명의 군사들은 정조가 직접 창설한 친위부대 장용영의 소속이었는데, 장용영의 외영은 바로 화성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용영과 화성은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고, 국왕의 정치개혁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용영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정조 24) 4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