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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사릉 학술이야기

사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 『숙종실록』 1698년(숙종 24) 12월 16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선유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살아 있을 때는 부부가 마땅히 유별하나 죽은 후에는 혼기(魂氣)가 서로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궤탁에서 제사를 지낸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대왕과 왕비가 비록 따로 장사를 지냈으나 같은 함에 넣어 함께 매장하는 것이 예에 있어서도 당연합니다. 또한 2백 년 간이나 같은 함에 들어 있던 신주판(神主版)을 나누어 양 능에다 매장한다면, 비단 예의 뜻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리(神理)에 있어서도 또한 부족한 것이 있을 듯합니다. 서울에 있는 구주(舊主)는 이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사릉(思陵)에 함께 매안하고, 영월에서 받들던 위판도 전에 함을 함께 한 것에 따라 장릉(莊陵)에 매안하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석정이 또 말하기를,
“단종 대왕이 승하하시던 처음에 본군(本郡)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장례 의식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사당에 배향하게 된 것입니다. 향리(鄕吏)는 이미 천인이 아니며 충절 또한 가상하니, 이 전대에 없던 성대한 전례를 추거하는 날을 당하여 마땅히 포증(褒贈)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이나, 지금 듣건대 자손이 없으니 만약 낭관(郞官)의 직위로써 특별히 포증을 더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들었다.”
하고, 이에 해조(該曹)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사릉에 안장된 정순왕후의 부군 단종은 세조에게 사약을 받은 후, 강가에 버려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역모죄로 폐서인된 왕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 당시 영월군의 호장 엄흥도가 정성을 다하여 이를 수습하고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 단종을 복위하면서 그의 충절을 함께 기리게 되었다.

엄흥도(嚴興道, ? ~ ?)

영월의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귀양살이하던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는데도,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르고는 몸을 숨겼다. 현종 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고, 영조 때 충의를 기리는 정문이 세워졌다. 뒤에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민들레가 핀 곡장 너머로 정순왕후가 잠든 능이 보인다. 정순왕후는 젊은 나이에 단종과 헤어져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