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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헌릉·인릉 학술이야기

헌릉·인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헌릉의 지문을 지어 올린 변계량 - 『세종실록』 1420년(세종 2) 8월 24일자 기사에는 원경왕후 승하 시 변계량이 지어 올린 헌릉의 지문이 기록되어 있다.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이시다. (중략)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嬪)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중략) 경자년 5월 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후략)”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 권홍(權弘)을 시켜 돌에 쓰게 하였다.

홍살문 쪽에서 바라본 헌릉의 전경이다. 정자각 오른 편으로 비각이 서 있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진덕박사(進德博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초 전의감승 의학 교수관(敎授官)이 되었다. 사헌부시사를 거쳐, 예문관의 응교(應敎),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급제했으며, 1417년 대제학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0여 년간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태조실록』편찬,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헌릉지문 외 다수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