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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선릉·정릉 학술이야기

성종과 소학이야기

조선 전기 문물을 완성시킨 성종

선릉에 잠든 성종은 학문을 좋아하는 호학의 군주이자, 그의 묘호가 말해주듯이, 많은 업적을 남겨 치세를 이룬 훌륭한 군주였다.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등을 완성하고,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등을 편찬 간행하였다. 세종 때의 집현전에 해당하는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세조 때 폐지된 호당(湖堂)제도를 부활하여 독서당을 따로 두고 문신 중에 뛰어난 사람을 골라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일정기간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의 완성

기존의 여러 법령과 교령을 종합하여 항구적인 법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세조 때 모든 법전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작업은 십 수 년간 이어져, 1485년(성종 16년)에 『경국대전』으로 편찬되었다.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조선의 국가 조직과 정치, 사회, 경제 활동을 망라하는 기본 법전이 되었다. 그 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바뀌지 않고 조선 왕조 500년여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으로 조선의 정치 제도의 정비 작업은 일단락되어, 조선은 명실상부한 유교적인 법치국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의 보급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윤리에서 기본이 되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강조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고자 간행한 책이다. 세종 때인 1431년(세종 13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삼강행실도』에서는 삼강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적이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라는 성종의 어명에 따라 1481년(성종 12년) 한글판 『삼강행실도』가 완성, 보급되어 백성들에게 유교적 윤리를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에 실린 효자도 문충정성(文忠定省). 효자문충이 일을 마친 뒤 먼길을 걸어 어머니를 문안하러 온다는 이야기다.

『소학』의 애독자 성종

성종은 『소학』을 매우 애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 재위 당시 신진 사대부 층으로 떠오른 사림 세력은 『소학』을 성리학적 윤리의 교과서로서 매우 중요시하며 소학 보급운동을 펼쳤다. 사림은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으로, 소학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백성들이 성리학적 질서를 따르도록 꾸준한 노력을 하였다. 성종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이러한 사림 세력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성종에게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왕비를 폐비한 개인사가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윤리적 방패막이로 『소학』을 부각시켰다고 해석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