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영역

조선왕릉

선릉·정릉 학술이야기

선릉의 조영과 수난사

선릉 조영을 위한 민묘 이장

조선 왕릉의 입지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신중한 일이었다.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면서도 다양한 풍수지리상의 길지로서의 요건을 갖춘 곳이어야 했다. 만약 이렇게 어렵게 찾은 지역이 이미 민가의 묘 자리로 쓰이고 있는 경우에는,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 민묘를 이장시키기도 하였다. 선릉을 조성하기 위해 물색한 지역에도 이미 민묘가 자리 잡고 있어 이를 이장토록 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군 1) 1월 26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산릉의 영역 안에 묘가 있어 옮겨야 한다. 이 때 이장해야 할 묘가 당상관(堂上官) 및 당상관의 부모, 처, 조부모의 것이면 쌀과 황두를 합하여 15석(碩)을, 그 나머지에는 쌀 2석과 황두 1석을 전례에 따라 보상해주었다. 임자 없는 묘는 경기 감사로 하여금 차사원(差使員)을 정해 군인을 주어 천장토록 하였다.
이러한 예는 이미 예종의 창릉을 조영할 때에도 나타났다. 민묘 이장을 위해서 같은 조건의 보상을 해준 것이다. 당시 하나의 왕릉을 조영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을 들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선릉의 임진왜란 수난사

이렇게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 : 왕과 왕비의 관)이 불탄 것이다.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4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成泳)이 치계하기를,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 8월 9일의 기사에는 누구의 시체인지 모를 시신이 정릉 근처에 버려져 있어 이를 왕의 옥체라고 짐작하고 이 옥체를 봉안하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몇몇 군사들이 경쟁하였다는 내용의 보고도 올라와 있다. 당시 선릉과 정릉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평화로운 도심의 숲 선릉

근방의 민묘를 이장시키며 공들여 조영한 선릉은 현재 서울에서도 가장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고 있다. 빌딩숲 사이로 우거진 소나무와 푸른 능선은 바쁜 도심의 사람들에게 여유로움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준다.

평화로운 선릉(성종대왕릉)

봄가을의 소풍객, 마음의 여유를 위해 산책길에 오른 삼성동 일대의 회사원들, 답사객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의 숲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