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일들의 귀추에 따라 다양한 세력이 부침을 겪기도 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가 왜적과 결탁하여 선릉과 태릉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왕릉 내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큰 벌을 받았는데, 왜적과 결탁하여 봉분과 재궁(관)을 무참히 훼손한 백운기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선조실록』에는 선릉과 태릉을 포함하여 선릉 옆에 있는 정릉(靖陵)과 태릉 옆에 있는 강릉(康陵)도 왜적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