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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의릉 학술이야기

경종과 장희빈 이야기

장희빈의 아들 경종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창덕궁 취선당에서 숙종은 즉위 14년 만에 드디어 첫 아들을 보게 된다. 이 왕자는 후에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에 오르는 20대 경종임금이 된다. 우리에게는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희빈 장씨가 경종의 생모가 된다. 경종의 탄생으로 조정은 기사환국이라는 파란을 낳았으나, 오랫동안 후사가 없던 숙종에게는 금지옥엽이 생긴 것이고, 장희빈에게는 신분 상승의 꿈의 발판이 생긴 것이다.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일화

일설에는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일화가 전해진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의 무고죄로 사약을 받는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세자가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였다. 숙종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한때 총애했던 후궁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세자를 희빈 장씨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는데, 갑자기 독기 서린 눈으로 변하여 ‘이씨(李氏)의 씨를 말리겠다’라며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린 것이다. 곁에 있던 환관들이 겨우 세자에게서 희빈 장씨를 때내어 놓았지만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종이 남성 구실을 하지 못하여 후사가 없는 것이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일화는 희빈 장씨의 간악을 묘사하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일화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희빈 장씨의 자진이 경종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종을 위한 숙종의 부성애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의 무고죄로 희빈 장씨는 자진하였다. 이 후 숙종은 세자에게 상주의 예를 다하라는 명을 내렸고, 장씨를 위해 세자의 상복을 3년복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상례를 일반후궁들과 달리 궁에서 주관하게 하였으며 종친 1품의 예로 예장할 것을 허락하였다. 장례 역시 일반 후궁보다는 높고, 왕비보다는 낮은 4개월장으로 치루게 하였으며, 묘소 택지를 왕실에서 주관하여 정하게 하였다. 이후 1717년에 양주 인장리에 있던 장씨의 묘가 불길하다하여, 이장할 것을 명하고 광주 진해촌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때 노론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이장을 명하였다. 이처럼 숙종은 비록 죄인으로 자진하였지만, 한때는 중전의 자리에도 있었고, 세자의 생모가 되는 희빈 장씨에 대한 일을 각별히 생각하였으며, 이는 경종을 위한 숙종의 부성애라 볼 수 있다.

즉위 후의 생모추숭사업

경종이 왕위에 오르고 희빈 장씨에게 특별한 명호(名號)를 내려야 한다는 상소로 인해, 처음 희빈 장씨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1722년(경종 2) 10월 10일에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숭하였다. 정확히 자진한 지 21년(희빈 장씨는 1701년 10월 10일에 자진함)만에 왕의 생모로 추숭된 셈이다. 부대빈이라는 예는 선조의 사친 덕흥대원군 추숭을 인용하여 본관을 취하고, 특별히 빈(嬪)자 앞에 대(大)자를 붙여서 정하였다. 따로 시호(諡號)나 궁호(宮號)를 정하지 않은 것은,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종친)으로의 추존제도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즉,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모든 장씨의 호칭을 정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희빈 장씨의 사당은 대빈궁(大嬪宮)이고, 묘소는 대빈묘(大嬪墓)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