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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의릉 학술이야기

의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왕의 능 행차 - 『영조실록』1725년(영조 1) 8월 27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의릉(懿陵)에서 환궁하다가 길가에 가마를 멈추고 양주(楊州)에 나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그 고을의 폐막을 물었다.

의릉 행차 시 백성들의 민원을 해결했던 조선21대 왕 영조(英祖,1694~1776)

- 『영조실록』1726년(영조 2) 2월 1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의릉(懿陵)에 행행하여 예법대로 성묘를 하고, 재전(齋殿)에 환어하여 경기 관찰사 및 수령을 불러 백성의 폐단을 물었다.
궁궐의 정전에서 신하들의 상소문만을 처리하던 조선의 왕은 백성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직접 살필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성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선왕의 능에 행차하는 것은 백성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능행차 시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민원을 처리한 기록이 영조의 의릉 행차 기록 외에도 다수 남아있으며, 능행에 나선 왕과 백성들의 만남에 대한 일화가 다양하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