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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정릉 학술이야기

신덕고황후 이야기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조영한 능

태조는 신덕고황후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궁에서 가까운 곳인 황화방(현재의 정동)에 웅장하게 능을 조영하였다. 그리고 능의 동쪽에 흥천사라는 원찰을 세워 자주 왕래하였고, 능에 재를 올리는 흥천사의 아침 종소리가 궁에서 들리면, 그제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세자 책봉에 반발한 왕자의 난

태조의 뜻에 따라 궁궐의 가까운 곳에 정성스럽게 지어진 정릉은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조는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후 신덕고황후에게서 방번, 방석 2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세자를 책봉하면서 장성한 신의고황후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어린 신덕고황후의 소생 방석을 선택한 것이 왕실에 화를 불러일으켰다. 신의고황후 소생의 여섯 왕자, 그 중에서도 방원, 즉 훗날의 태종이 이에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고, 신덕고황후가 승하한 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물어지는 정릉의 숲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수순을 밟은 태종은 신덕고황후의 능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1406년(태종 6) 정릉의 능역이 도성 안에 위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능역 또한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를 주택으로 허가하였다. 따라서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짓게 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애써 조성한 사랑하는 아내의 능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 남몰래 눈물지었다고 한다.

광통교 다리 밑에 밟히게 된 정릉의 석재

1409년(태종 9)에는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태종이 이를 허락하여 지금의 정릉 위치인 도성 밖 양주 땅 사을한록으로 천장하였다. 태종은 이때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아버리고 정자각을 헐었으며, 석물들을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년(태종 10) 여름에는 청계천의 광통교가 홍수로 인해 무너지자 예전 정릉의 석물이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들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은 왕비의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밟고 다니게 되었다.

현재는 다리를 떠받드는 석재이지만,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듯 병풍석의 구름문양이 섬세하고 아름답다.광동교 다리 밑에 사용된 정릉의 석재

신덕고황후의 원을 씻어주며 내린 비

태종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태종과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고황후만을 함께 모시고, 신덕고황후의 신주는 모시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로써 태조가 사랑했던 신덕고황후는 죽은 후에도 새어머니를 미워한 아들에 의해 한참을 푸대접 받다가,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다시 정릉의 상설을 복구하고 종묘에 배향을 결정하게 되어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이 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세원지우란 신덕고황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