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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석물

석물의 역사와 변화

왕릉에 석물을 세워놓는 제도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어 고려시대로 이어졌으며 14세기 말엽에 공민왕의 현릉(玄陵, 1374년)과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 1365년)에서 능침구조와 석물의 종류, 배치가 규범화되었다. 그리고 공민왕릉에서 형성된 석물의 배치와 구성의 규범은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의 건원릉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석물 배치는 제4대 세종대에 작성된 여러 규법집인 세종실록 「오례의」, 그리고 성종 5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1474년)에 따라 제작되었으며, 조선 왕릉 고유의 석물 구성 및 배치, 조형적 특징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에 꽃무늬가 조각되었고 동물형 세호가 나타나는 등 조선왕릉만의 독특한 형태가 등장하였다. 또한 영조대에 국조상례보편』(1758년)이 편찬되면서 능제 형태가 많이 줄어들어 병풍석을 완전히 폐지하고 석물의 크기도 작아지는 등 전체적으로 간소화되었다.

석물의 역사와 변화
구분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기간 15세기 전반 - 15세기 중반 15세기 후반 - 16세기 후반 17세기 초반 - 18세기 초반 18세기 중반 - 20세기 초반
왕릉이름 건원릉(1408) - 창릉(1470) 선릉(1495) - 강릉(1567) 목릉(1630) - 의릉(1724) 원릉(1776) - 유릉(1926)
특기사항 조선건국 1392년 국조오례의 간행 1474년
(성종5년)
임진왜란1592년
(석공 피랍)
국조상례보편1758년
(영조34년)
주요특징 능원을 잔디 언덕 위에 배치하며 석마 등장 석물의 규모가 커지고 장엄함 기간에 비하여 능의 수가 가장 많고, 후반은 석물 규모가 작아짐 능원이 2단으로 바뀌고 다양한 양식이 혼재함
병풍석 면석에 12지신상 부조 장식, 후반에 병풍석 사라짐 병풍석 재도입, 우석에 영저영탁 대신 구름무늬 장식 난간석만 설치 면석에 모란문양, 우석에 연잎 장식
장명등 초반 4각형 / 후반 8각형, 사각화창 8각형, 4각화창 4각 석등 등장, 4각 화창 8각형, 원형화창4각형, 원형화창
석수 헌릉 석수 각4쌍, 그 외 석양 · 석호 각 2쌍 석양 · 석호 각 2쌍 석양 · 석호 각 2쌍 후반 황제릉에서는 석양과 석호는 사라지고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가 등장
망주석 귀 모양에 간단한 장식과 구멍 있음 겹친 당초무늬의 화려한 장식에 구멍 있음 동물형 세호에 구멍 사라짐 동물형 조각이 정교해지고 구멍 없음
문무석인 초반 : 유연한 선과 둥근 환조 몸체로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계승
후반 : 크기가 커지며 장엄미가 생기며 손이 노출됨
세부를 간략화 시킨 대담한 선과 단순화된 옷 주름 표현으로 괴량감이 강조되며 장엄한 조선능묘조각 형식 확립 옷 주름과 발을 벌린 자세가 정형화되었고, 무인석이 없는 왕비릉이 많으며 후반부터 키가 작아져서 장엄미가 사라짐 사실에 가까운 복식과 인체표현으로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며, 금관조복형 문석인 등장하여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

조선왕릉 석물의 요소별 특성과 변화

조선왕릉의 석물은 주로 능침공간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이는 석물이 피장자를 위해 만들어진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능침공간의 석물 구성은 아래와 같다.

봉분과 봉분주변

조선시대 왕릉의 둥근 봉분은 대개 보통 6m 정도의 높이이며, 호석의 역할을 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져 있는 경우도 있고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는 경우도 있다. 봉분의 형태가 원형인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의 경우 명나라 때부터 황제릉이 원형분으로 되었다. 원형봉분의 주변에 12지신상을 호석으로 두른 구조는 한국 고유의 봉분 형태이다.

병풍석 (屛風石, 병석(屛石), 사대석(莎臺石))

여러 가지 석재로 이루어진 병풍석은 다른 나라와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병풍석의 구조는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의 기록을 보면 지대석(地臺石), 면석(面石), 우석(隅石), 만석(滿石), 인석(引石)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봉분의 흙이 흘러내는 것을 실질적으로 방지하는 기능을 하고, 상징적으로는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석의 구성과 명칭에 대한 설명으로 인석, 지대석, 면석, 우석이 표기된 사진

병풍석 표현은 고려의 공민왕릉 병풍석의 형식을 계승하여 건원릉(健元陵, 태조)과 헌릉(獻陵, 태종)의 병풍석 면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면석 옆의 우석은 불교의 영저(靈杵, 금강저)와 영탁(靈鐸, 방울)을 새겼다. 영저와 영탁은 불교에서 수호적 성경을 지닌 불구(佛具)이며 십이지신과 마찬가지로 능을 정신적으로 수호하는 상징적인 도상이다. 이후 『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우석의 영저와 영탁 무늬는 구름무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장릉(長陵, 인조)을 시작으로 면석의 십이지신상이 없어지고 모란무늬로 바뀌었다. 이는 장릉이 뱀의 피해가 있어 능을 옮겼기 때문에 원래 능에 있던 십이지신상의 뱀상 조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이 있다. 모란은 화려하면서도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병풍석의 장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모란은 융릉(隆陵), 홍릉(洪陵), 유릉(裕陵) 병풍석에서 나타난다. 또한 우석도 기존의 구름무늬에서 연꽃과 난초 무늬로 바뀌었다. 따라서 불교의 요소가 왕릉 석물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초기에 해당되며, 시대가 바뀔수록 점차 조선만의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병풍석의 문양들 사진

만석은 면석과 우석을 위에 있는 것으로 태릉(泰陵, 문정왕후)을 시작으로 십이지신상의 표현이 글씨로 바뀌어 만석이 새기기도 하였다.

장릉-37에서 보여지는 인석의 형태 이미지와 홍릉-34에서 보여지는 인석의 형태 이미지

인석은 만석과 봉분안에 두른 삼물(석회, 가는 모래, 황토)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다란 사각기둥의 형태로 12개가 놓여 있다. 인석 끝에는 국화, 규화(접시꽃), 모란 등의 꽃무늬를 새겼다. 이후 융릉(隆陵, 장조)을 시작으로 꽃봉우리 모양으로 나타나며 대한제국의 홍릉(洪陵, 고종)과 유릉(裕陵, 순종)에서까지 적용되었다.

면석과 우석의 장식에 따라 병풍석의 내용을 3가지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

시기별 병풍석 정보
구분 시기 면석 장식 우석 장식
초기 태조 건원릉 ~ 태종 헌릉 십이지신상+운채+서기+하단에 당초문 영저와 영탁
중기 문종 현릉 ~ 선조 목릉 십이지신상+운채 구름 문양
후기 인조 장릉 ~ 순종 유릉 모란꽃 연꽃 혹은 연잎+난초
난간석(欄干石)
난간석의 구성과 명칭 이미지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봉분을 울타리처럼 두르거나 병풍석 없이 봉분을 두르고 있는 석물로, 왕릉의 봉분 주변에 난간석을 조성한 것은 우리나라 능제의 특징이다.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그 초기 예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석물로, 건축물에 난간을 돌로 만들었던 방식을 왕릉석물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 광릉 이후 병풍석이 조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병풍석의 유무와 상관 없이 거의 모든 왕릉에는 난간석이 조성되어 물리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과 고석(鼓石)
혼유석의 구성과 명칭 이미지

능의 정면에 상의 형태로 놓인 혼유석의 원래 명칭은 석상(石床, 石牀)이다. 재궁(관)을 넣은 후 그 통로를 막고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그 위에 혼유석을 설치한다. 혼유석이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속칭(俗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혼이 앉아서 쉬는 의미로 해석된다. 혼유석의 기원은 신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종무열왕릉의 봉분 앞에 공양물을 얹을 수 있는 석상의 잔재가 있으며, 그 외의 통일신라 왕릉에는 대부분 석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석물은 중국의 능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창안의 석상으로 후에 혼유석의 개념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둥근 북 모양의 고석은 ‘족석(足石)’, '부석(跗石)'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원릉(태조)과 헌릉(태종과 원경왕후)은 5개를 배치하였고, 영릉(세종과 소헌왕후)부터 4개를 배치하였다. 그러다가 휘릉(徽陵, 장렬왕후)에서 5개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시 따랐고, 그 이후에는 다시 4개를 설치하였다. 고석의 높이는 평균적으로 50cm정도인데 둥근 형태의 사면에는 귀면(鬼面) 모양이 새겨져 있다. 『국조오례의』에는 나어두(羅魚頭)를 새긴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어두귀면(魚頭鬼面), 즉“물고기 머리에 귀신 얼굴”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조각하여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면은 입에 고리를 물고 있어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웃고 있는 인상을 준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석양

봉분 주변에는 동물 조각이 둘러져 있는데, 정면을 제외한 삼면에 석호와 석양이 2쌍씩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능에 동물상을 배치하는 관습은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성덕왕릉(736년경)의 네 귀퉁이에 사자를 배치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석사자 대신에 석호가 나타났으며 개성의 7릉군 3릉에서 석양이 함께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공민왕릉의 석수 배치는 태종의 헌릉의 석호, 석양 배열의 원형이 되었다. 능의 주변에 석호와 석양을 배열하는 관습은 이미 중국에 있었으며 후한시대에 석인, 석주와 함께 양, 호랑이, 낙타, 말을 능 앞에 배치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왕릉 동물상의 위치로 보아, 조선 왕릉의 석호와 석양은 능의 뒤편 봉분 주변에 놓여 있지만, 중국의 동물상들은 능의 입구, 즉 신도 양옆에 인물상과 함께 도열되어 있어, 그 역할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실제 궁전이나 관아의 문 앞에 경비를 세웠던 모양을 모방한 형상이고, 석수가 놓인 방향에서도 중국릉의 석수는 신도를 향하여 일렬도 도열하는 형식인데, ‘분총(墳塚)을 표식(表飾)하여 생전의 의위(儀衛)와 같게 하려는 까닭’으로 권력의 과시나 길상의 목적이 강하다.

석호

이에 비해, 조선의 석수들은 봉분 주변에서 능이 아닌 외부를 향해 있다. 즉 곡장에 머리를 대고 있고 봉분 쪽에 엉덩이만 보이도록 배치한 것은 능침에 대한 외부의 침입에 대한 경계에 전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력의 과시보다는 능을 수호하고 음양의 기운의 균형을 잡기 위한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석수의 자세에서 석양은 항상 서있는 자세로서 수호의 느낌이 강조되었고, 반면 석호는 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도 충분한 경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석양과 조화 있는 조형감과 심리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어 능역의 분위기에 안정감을 준다.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배치한 것은, 양은 온순함을, 호랑이는 사나움을 강조하며, 또한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양은 희생의 동물로 제물로도 사용되지만 신양(神羊)의 성격을 띠어 성(城)수호의 의미를 띤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사악한 악귀를 막는 성격(벽사)을 지닌 동물상으로 볼 수도 있다. 호랑이는 산천임택(山川林澤)에서 맹수의 해를 막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역시 능을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조선 왕릉의 석물은 중국처럼 권위의 상징이기 보다는 벽사의 의미가 강조된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편안히 앉아 있고, 얼굴 역시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친근하고 온순한 표정을 하고 있다.

망주석(望柱石)과 세호(細虎)

혼유석(석상) 좌우에 촛대처럼 서 있는 한 쌍의 망주석은 석망주, 망두석(望頭石), 촛대석, 화표석(華表石), 전죽석(錢竹石)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망주석의 기원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중국에서는 묘역이나 신도의 입구를 표시하거나 석물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조선왕릉에서 망주석의 기능은 중국과는 다르게, 혼이 자기의 유택을 찾을 때 이용한다고 하고, 다산을 위해 상징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칭으로 볼 때, 바라볼 망(望), 기둥 주(柱)가 의미하듯이 묘가 있다는 곳을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망주석 가운데에는 상징적인 무늬를 새기는데, 『국조오례의』에는 ‘귀를 만들어 구멍을 판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상례보편』에는 ‘세호를 새긴다《왼쪽 기둥에는 올라가는 모양을, 오른쪽 기둥에는 내려오는 모양을 새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의 역할과 새긴 목적이 기록에 없어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형태로 조각되나 일부 왕릉은 반대로 조각되는 경우도 있다.

망주석 명칭에 대한 정보로 원수 운두 세호 주두 대석으로 구분된 세호부분과 망주석 사진

장명등(長明燈)
장명등 명칭도로 정자석, 개석, 회사석, 대석에 대한 이미지

장명등은 중계의 가운데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놓여 있다. 장명등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석등으로 조선 왕릉에서만 등장하는 석물이다. 『국조오례의 · 흉례(凶禮)』의 장명등에 관한 기록을 보면 ‘4방의 옆을 통해 파서 연기(烟氣)를 흩어지게 한다’ 라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어, 초기에는 실제로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명등에서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어 상징적인 조형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조상으로 보면 일반적인 석등보다 옥개석이 더 길쭉하며 대석(臺石)이 굵어서 부도의 형식을 띠고 있다. 옥개석 위에는 중앙에 보주를 얹어서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장명등은 초기에는 고려시대 왕릉과 같이 화사석의 평면이 사각형이었으나 이후에 팔각형, 사각형, 팔각형의 형태로 반복 변화된다.

장명등의 형식
구분 제1형식 제2형식 제3형식 제4형식 제5형식 제6형식 제7형식
사진 제1형식 사진 제2형식 사진 제3형식 사진 제4형식 사진 제5형식 사진 제6형식 사진 제7형식 사진
능명 정릉
(貞陵)
건원릉
(健元陵)
광릉
(光陵)
영릉
(英陵)
명릉
(明陵)
융릉
(隆陵)
홍릉
(洪陵)
면수 4 8 8 8 4 8 4
화창
모양
□ + 8각 8각 8각
특징 고려
석등형
불교
석등형
부도형태
가미, 하단
짧음
전형적인
장명등
형태, 하
운족형
건축형
지붕에
목각
테이블
다리
다리에
안상형
가늘고
긴 형태
문석인(文石人)
문석인 명칭도로 북두, 대, 포, 화에 대한 이미지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 포(袍)로 불리는 옷, 허리띠인 대(帶), 손에 드는 홀(笏), 가죽신인 화(靴)를 갖춘 공복을 착용한 백관의 모습이다. 조선왕릉 문석인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같지만 키, 얼굴의 크기와 표정, 선의 부드러운 정도, 옷 주름의 표현, 모서리의 곡선화 정도 모자의 형태 등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문석인의 시대별 특징
구분 1기 2기 3기 4기
크기 250cm 내외 300cm 내외 180cm 내외(후반) 250cm 내외
제1기 문석인 형태 제2기 문석인 형태 제3기 문석인 형태 제4기 문석인 형태
신체비례 4.7등신(건원릉) 3.3등신(태릉) 3-4등신(의릉) 5.3등신(융릉)
신체형태 초반 : 유연한 선과 둥근 환조 몸체로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계승
후반 : 크기가 커지며 장엄미가 생기며 손이 노출됨
세부를 간략화 시킨 대담한 선과 단순화된 옷 주름표현으로 괴량감이 강조된 주먹코로 전형적인 조선 석의 양식 옷 주름과 발을 벌린 자세가 정형화되었고, 무인석이 없는 왕비릉이 많으며 후반부터 키가 작아져서 장엄미가 부족함 사실에 가까운 복식과 인체표현으로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며, 금관조복형문석인 등장하고, 이는 당시의 시대정신 반영임
얼굴 장년의 얼굴 세부 표현 사각형의 얼굴과 주먹코로 중년의 모습이며, 목을 어깨에 파묻음 약간의 미소가 있음 미소가 뚜렷이 나타나며 사실성이 반영된 세부 표현
사각복두 사각복두 사각복두 사각복두/금관
분위기 온화하면서 장엄 단순하고 장엄 규모가 작아지면서
장엄미는 사라짐
장엄미보다는
사실성이 보임
무석인(武石人)
무석인 명칭도로 투구, 흉갑, 신갑, 검, 화에 대한 이미지

능침의 하계에는 무석인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한 채 서있다.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문석인에 비해 다소 커진 얼굴과 바튼 목, 얼마간 굵어진 듯한 몸 처리와 약간 길어진 상반신의 처리 그리고 중요한 골격마디의 강조 등으로 무관의 특징을 표현하였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칼을 잡고 서 있는 무석인의 형식은 전 시기에 걸쳐서 같은 세부요소들이 교차로 나타나므로 문석인에 비하여 시기별로 뚜렷한 구분을 하기가 힘드나, 크게 보면 문석인에서 보이는 변화와 비슷하게 변한다.

문석인의 시대별 특징
구분 1기 2기 3기 4기
특징 사실적인 조각, 부드러운 문석인에 비해 우람한 형태로 입체감이나 괴체감이 살아있음. 몸체 모서리의 자연스러운 표현 모서리각 각이 지도록 조각, 하체보다 상체가 비대해 짐. 목이 없어지고 커진 얼굴에 짧은 상반신으로 기괴함과 장중함이 나타남. 손과 팔꿈치가 수평을 이루고 있음. 귀가 밖으로 노출 크기가 작아지고 정형화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 투구의 목가리개가 위로 올린 형태가 등장. 운형(雲形)의 투구창 문무석인의 위계가 없어짐(단 소멸), 의복형태가 변화, 작아진 얼굴과 개성 있는 표정이 나타남. 몸의 굵기가 축소. 사실적인 옷 주름 표현, 무석인 투구의 깃털 장식이 삼지창으로 변화, 배갑에 동물상이 등장
석마(石馬)
석마

석마는 명나라에서는 다른 석수와 같이 신도에 배치하여 왕의 소속을 의미하지만 조선 왕릉에서는 왕의 신하의 소유로 문무석인의 뒤에 약간 남쪽으로 한 필씩 서 있다. 말의 자세는 등의 선이 거의 수평으로 움직임이 전혀 암시되지 않았으며, 고삐 없이 석인상 뒤에서 고개를 숙여 대기하는 자세이다.

말의 크기나 형태 또한 사실감이 떨어진다. 크기는 문무석인에 비해 말의 크기가 너무 작고 안장이 없으며 꼬리도 길게 땅에 끌리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석마는 물리적인 운송보다는 상징적인 운송을 염두에 둔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원릉의 석마는 다리 사이가 좌우로 뚫렸으며, 머리를 땅에 박고 읍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후 대부분의 석마 다리 사이는 막혀 있으며, 막힌 면에는 난초 같은 식물(건릉의 의궤에 난초 형상이 있음)이 조각되어 있다. 다리 사이를 막았던 이유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뚫린 경우(건원릉, 헌릉, 장릉(長陵), 장릉(章陵) 등)도 종종 있는 것을 볼 때 석물의 견고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황제릉의 석물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제도로 바뀌게 된다.

황제릉의 석물

남양주 홍릉과 유릉의 석물은 능침 주변과 침전 앞 석물로 나눌 수 있다. 능침 주변에는 봉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을 배치하여 조선왕릉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기존 능침에 있던 문·무석인과 석양·석호·석마 등 능침을 수호하는 상징적 기능을 했던 석물들은 침전 앞으로 배치하였다. 또 전통적인 석호와 석양 대신 기린(麒麟), 코끼리[象], 사자(獅子), 해태[獬豸], 낙타(駱駝), 말[馬] 같은 석수들로 새롭게 구성하여 조선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능침공간에 배열된 조선왕릉의 석물이 왕을 호위하는 상징성이 강하게 나타내었다면, 홍릉과 유릉에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침전 앞에 석물을 놓아 황제로서의 위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이 직접 왕릉제도를 황제릉제도로 개혁한 것으로 중국 명나라 황제의 제도를 참고하여 기존의 조선왕릉 제도를 계승한 형태이다.
1926년에 조성된 순종의 유릉은 기본적으로는 홍릉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지만 조각기법에서 사실적인 인체비례로 변화했고 조각 자체도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조선 전통 조각기법과는 전혀 다른 서양식 조각수법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인데, 외국 조각가들이 석물 조성에 참여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제작시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를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다.

석물의 제작과 기록

재료적 특성

조선 왕릉 석물은 화강석으로 제작되어 있다. 화강석은 입자가 곱고 철분이 없는 밝은 색상을 띠고 있어 세부 조각표현이 잘 드러난다. 특히 석질도 부드러워 깎기 좋은 강화도 화강석을 최고의 품질로 여겼다. 그러나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일부 능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능은 서울 근교와 수원 등의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매우 단단하고 석질이 좋은 화강석으로 제작되어 거의 영구적으로 보존 될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의 분위기에 작용하여 정교한 세부는 보이지 않지만 투박하고 온후한 느낌의 질감을 나타낸다.

제작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망하면 능역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부속기관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주요 석물 제작팀(大浮石所), 건축물에 사용되는 석물을 제작하는 팀(小浮石所), 석물 운반팀(輸石所) 등을 구성하여 석재의 채취에서 가공과 운반 및 설치에 이르기까지 분업화하여 석물을 조성했다. 그리고 석물의 공정을 지휘하는 패장(牌將), 편수(邊手), 조각을 하는 석수(石手), 그리고 석물을 설계하는 화사(畵師) 등이 서로 협력하여 석물을 완성하였다.

제작기록
제작기록물 이미지

왕릉 조성의 전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등 다양한 기록물이 존재하고 있어서 당시의 특정 왕릉 조성의 배경과 역사와 더불어 석물 양식 변화의 이유까지도 알려 주고, 특히 석물 제작자의 이름은 물론 조성비용과 날짜에 구분이 가능하여 일목요연한 역사적 분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산릉도감의궤』를 통하여 각 석물의 종류나 크기 및 모양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능역에 포함되는 모든 석물의 모양을 그리고 그 옆에 간략한 내용 설명과 함께 치수를 적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