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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건축물

조선왕릉 건축물

정자각(丁字閣)
정자각

정자각은 왕릉제향을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을 이루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른다.

정전은 대부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면 3칸은 모두 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 측면은 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배면의 어칸은 신문(神門)이 설치되어 있으며, 좌우의 협칸은 벽으로 되어 있다. 배위청(拜位廳)은 정면 1칸에 측면 2칸으로 6개의 나무 기둥만이 세워지고 사방이 개방되어 있어서 제사를 지낼 때 움직임을 편하게 한다.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

월대와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으며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되어 있다.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뉘며, 두 계단 중에 하나는 향로계(香路階, 운계)로 측면에 구름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진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 동계)를 이용한다. 서쪽 계단은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예감으로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한다.

가구는 정전이 5량가, 배위청이 3량가로 구성되어있으며, 공포는 대부분 익공식이다. 지붕은 기와지붕이며, 맞배지붕의 형태로 전면과 좌우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 제일 높은 용마루의 끝에는 장식기와인 취두가 설치되어 있고,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이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5칸 건물이 정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시기에 따라 정전의 좌우에 익각(익랑)을 달은 8칸 정자각(정전 5칸, 배위청 3칸)이 선택되어 지어졌다. 현존하는 8칸 제도의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지붕의 형태도 팔작지붕이 일부 사용되었으나 현재 남은 정자각은 대부분이 맞배지붕이다. 산릉도감의궤 등 문헌에 의하면 영릉(英陵), 강릉(康陵), 장릉(長陵), 영릉(寧陵)의 정자각이 팔작지붕이었으나, 후대에 모두 맞배지붕으로 교체되어 현재는 숭릉의 정자각만이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남아있다.

비각(碑閣)

무덤 주인공의 표석(表石)을 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비각이다. 표석은 보통 1.5미터 높이의 장방형 돌에 주인공의 호칭을 새기고 간략한 이력을 적는데 하부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도 화강석으로 기와지붕 형태를 다듬어 올려놓는다. 비각은 보통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의 간소한 규모이다.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서 내구성을 높이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한다.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보통 비각 안에는 표석 1개가 설치되지만 건원릉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와 표석 각 1개가 있고, 헌릉 비각에는 신도비가 2개 있다. 신도비는 능 주인의 생애와 업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세우는데, 중국 진송 때 비롯되어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현재 조선왕릉 내에 있는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 신도비와 태종 헌릉 신도비뿐이다. 이후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까지 세웠다가, 단종대에 문종의 현릉을 조성할 때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이는 왕의 생애와 업적 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 말년에 표석을 세울 필요성이 논의되어 1682년(숙종 8)에 조선왕릉 중 처음으로 효종의 영릉에 표석을 세웠다. 이후 숙종, 영조, 순조대에 신도비가 없는 왕릉에 모두 표석을 세웠다. 그 외에 비각이 2칸인 경우는 능 주인이 추존되었거나 쌍릉이나 동원이강릉 등 2명 이상의 왕과 왕비를 모실 때 표석을 따로 세워기 때문에 늘어난 현상이다.

수라간(水喇間)과 수복방(守僕房)

수라간은 제향이 있을 때 간단히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를 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은 정자각 서남쪽에, 수복방은 정자각 동남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건축하였다. 수라간과 수복방은 18세기 중반까지는 2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이후부터는 3칸규모로 조성되었다.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향로·어로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이다. 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위에 심방과 띠장을 가로지르고 가는 살을 약 15~24cm 간격으로 박고 중앙에는 삼지창과 태극문 등을 새긴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지붕은 달지 않는다. 홍살문은 이곳 외에도 능 동구 밖이나 기타 특별한 시설이 있는 곳에 세우며 그 크기도 위치에 따라 다르다. 동구릉의 경우와 같이 왕릉이 군집되어 있는 경우 능의 초입에 외홍살문이 있으며 각 능마다 내홍살문이 따로 있다. 이 경우, 외홍살문이 내홍살문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홍살문의 형태에는 홍살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가 높아지는 ‘산(山)’자형과 같은 높이를 유지하는 ‘일(一)’자형이 있다. 홍살 사이의 간격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정자각의 규모가 커지면서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시각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붉은 창살이라는 이름처럼 홍살문은 좌우 기둥과 인방, 살 등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제례를 위한 의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제례가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이나 정자각이 있는 능 중심부에서 2, 3백 미터 이상 떨어진 동남쪽에 놓인다. 제사가 있을 때 왕이나 제관은 일단 재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면서 옷을 갈아입고 제사에 나서게 된다. 건물의 구조는 팔작지붕에 민도리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건물의 칸수는 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향대청 행각 전사청 재실 위치 이미지

조선왕릉의 건축물 특징

특징

조선왕릉의 건축물들은 당대 일반적인 건축물이 지닌 시대적 특징들을 반영하며 조선시대 건축기술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조선시대 건축은 삼국시대 이래 1천년에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축적하고 발전시킨 목조건축의 기술적 성장의 최종적인 단계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한반도의 자연조건을 충족시키면서 한민족이 일구어 온 예술적 감각이 농축되어 있다. 과장된 인공적 조작을 기피하고 자연이 만들어내는 미적 효과를 최대한 반영하고 이를 수용하여 자연에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해서 만들어지는 조선시대 건축술을 왕릉의 건축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세부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와 비례를 중시하는 것은 조선시대 건축물이 갖는 전통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풍수전문가에 의해 선택된 왕릉에서도 잘 반영되어 주변 자연환경에 적절히 조화된 건축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건축물의 조성과정과 기록

왕릉은 종묘나 궁전, 사직단과 함께 조선왕조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구축물의 하나이다. 특히 왕릉의 경우에는 왕이 승하하고 나서 5개월 안에는 반드시 그 조성이 완료되어 왕의 시신을 그곳에 안치해야 하는 시간적, 절대적 제약을 안고 조성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왕이나 왕비 또는 왕세자, 왕대비가 승하하면 궁궐 안에 빈소를 차려놓고 그 시신을 5개월 동안 모셔두고 정성껏 제사를 모신다. 이 기간 동안에 왕릉의 터를 결정하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가장 좋은 석재와 목재를 수집한다. 이어서 봉분을 꾸미고 봉분 주변의 석물을 조각해서 배치하고 정자각을 비롯해서 비각, 홍살문 재실 등을 지어내는 것이다. 그 공사과정은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할 수 없는 신속하고도 정확한 작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통 국상이 선포되면 당시의 좌의정(左議政)이 국상을 총괄하는 총호사(總護使)가 되었고, 판서(判書)들이 각 도감을 담당하게 된다.

가장 어려운 결정은 터를 잡는 일이다. 풍수지리사상은 터를 결정하는 중요한 지침이지만 그것이 항상 전문가들의 일치된 결론으로 모아지지는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오고가게 마련이며 최종적인 결정은 오로지 왕의 손에 달려있다. 조선왕릉이 서울 외곽의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수원이나 여주 등 먼 거리까지 확장된 배경에는 이상적인 터를 잡기 위한 풍수전문가들의 부단한 노력과 이를 수용한 여러 왕들의 고심에 찬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재는 상대적으로 구하기 수월했던 반면 목재의 경우가 약간의 어려움을 야기시켰으나, 그 수량이 많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곤란을 겪는 일은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몇 군데 왕실 소유의 산림을 확보하고 목재를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목재의 운반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목재운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길을 내는 일이 더 큰 노력을 필요로 하였다.

최고로 숙달된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춘 기술자들이 왕릉 조성에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중요한 공사에 투입되는 기술자들을 관리해 왔으며 이들은 궁궐이나 종묘를 비롯해서 왕릉조성과 같은 공사에 전문적으로 종사하였다. 종종 이름난 목수는 비슷한 시기에 궁궐의 건축공사와 왕릉의 공사는 물론 왕실의 사당 건축공사에 종사하여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였다. 궁궐의 목수로 알려진 이들의 이름은 각종 왕실 기록물에 남아있어서 후세에까지 그 명성을 남기고 있다. 한 가지 색다른 점은 단청 즉 건물 표면에 문양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일만큼은 궁궐의 목수가 아니고 서울 근처 산속에 자리 잡은 불교사찰의 승려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승려들은 갖가지 기예에 능한 것으로 이름났었는데 이들 중에는 사찰 건물의 단청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궁궐이나 왕릉 건축물의 단청 작업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