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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발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왕릉 제도

한반도에서의 무덤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처음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지석묘(고인돌)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제도로 정립된 시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고유한 장묘문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경우는 초기에는 석총(돌무지무덤), 중기부터는 토총(봉토분, 굴식돌방무덤)을 조영하였다. 석총의 경우 땅 위에 방형으로 돌을 쌓아 계단식으로 조성하기도 했으며, 토총에는 왕궁에 버금가는 지하궁전을 조성하기도 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석총도 있는 반면 일반 봉토분도 등장하였고, 이는 봉토 속에서 석실이나 토축, 벽돌 중에 택하여 조성하였다. 신라에서는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고 다시 그 바깥은 봉토로 씌운 적석목관분이라는 거대한 능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봉분이 남쪽을 향하고 석물과 석인이 등장하게 되었다.이 중 석사자(石獅子)를 네 모퉁이에 배치하는 것과 상석이 봉분 앞에 생기는 것은 중국에서 볼 수 없던 것이며, 석물의 형태 또한 통일신라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왕릉이 평지에 입지하는 것이 선호되었지만, 통일신라 말기부터 풍수 개념이 적용되면서 능의 입지가 점차 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려 왕릉들은 풍수를 살펴 산줄기가 능 뒤에서부터 좌우로 뻗어 내리고 명당수가 능의 뒤쪽에서 앞쪽으로 모여 흘러가는 지세를 택하였는데, 이러한 택지 원칙은 조선시대에도 기본적으로 계승되었다.

왕릉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신라의 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비각 등은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다. 더불어 석사자, 석양, 석호들을 봉분 주위에 배치해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능침을 조영하였다. 역사상 우리나라의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에 왕릉 형식의 기본이 이루어지면서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졌으나 그 독창적인 모습은 조선시대 왕릉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왕릉제도

조선 왕릉은 고려를 계승하면서도 능에 진입하는 방식이나 배치방식, 석물의 형태 등이 고려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국조오례의』에 기초하여 조선왕조 내내 일관성 있게 왕릉의 형태를 유지하여 왔다. 조선시대의 왕릉제도는 원칙적으로 고려 말의 왕릉제도를 계승하고 있으나 시대적 자연관과 유교적 세계관 그리고 풍수사상 등에 의해 보다 특색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의 왕릉은 기본적으로 엄격한 예법에 의거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성의 법식은 원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능역주변의 자연지형과 잘 조화 되도록 하며, 때로는 능주의 유언이나 능주의 생전 삶의 태도를 감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후손들의 의지나 시대적 정황이 개입되어 각 능마다 약간의 변화와 특징이 나타나기도 한다. 능의 전반적인 형태를 고려할 때, 그 변화의 과정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능별 변화 과정
구분 능호 특징
1기 건원릉(健元陵) 고려시대의 양식을 계승
2기 영릉(英陵) 조선시대의 고유한 묘제가 정비, 독립된 양식을 반영
3기 광릉(光陵) 풍수사상을 더욱 강조, 간결화 된 능침공간
4기 원릉(元陵) 능침의 위계 변화와 간소화 된 상설체제
5기 홍릉(洪陵) 황제의 능으로 조성되어 능침의 상설체제가 변화

제1기는 고려의 능제를 기본으로 하며 일부 장명등, 망주석 등의 형태가 약간의 변화를 보이며, 제2기는 국가의 가례와 흉례 등을 다룬 『국조오례의』제정에 따라 조선시대 만의 독특한 장례문화에 따라 능역을 조성하였다. 제3기는 세조의 유교로 내부 방을 석실에서 회격으로 변화를 주었으며, 제4기는 영조대에 상례 제도를 다시 법제화하여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되었는데 문무인(중계와 하계)공간의 구분을 없애고 석물의 크기를 실물 크기로 축소하는 등의 변화를 주었다. 제5기는 대한제국시기로 왕의 명칭을 황제로 변환하고 능제도 황제의 능으로 변화하여 석물을 침전 앞으로 배치하고 석물의 종류도 증가하여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