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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입지 및 구성

조선왕릉의 입지

왕릉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조성된다.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라는 임시 기관을 설치한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치르는 기간(약 5개월)동안 전체 상례에 대한 재정과 문서 등을 관리하고, 재궁(梓宮, 관), 크고 작은 가마(대여(大輿) 등), 각종 의장(儀仗)을 제작하며, 발인(發靷)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빈전도감은 염습(殮襲), 성빈(成殯), 성복(成服)에 관한 업무를 하며, 장례 기간 동안 왕이나 왕비의 신주와 혼백을 관리하는 기관이다. 특히 빈전도감은 왕릉을 조성한 후 혼전도감으로 이름이 바뀌어 삼년상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부묘).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으로 건물 및 석물제작, 왕릉 자리 주변 정리 등 능 조성에 필요한 인원 관리 및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통 하나의 능을 완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능역(陵役)에 동원되는 인원은 6천명에서 많게는 1만 5천명 정도가 필요하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풍수 사상에 기초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조선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릉은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택지되었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동)과 백호(白虎, 서)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이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겹겹이 중첩되고 위요(圍繞)된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들어있는 현궁(玄宮)이 묻혀있는 봉분은 혈처(穴處)에 위치한다. 혈처는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봉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岡)이 땅의 기운을 저장하고 능의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孕)은 그 기운을 주입시켜주는 역할을 맡아 혈처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야지(野地)도 아니며 산지(山地)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리에 입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야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의 왕릉이나 산지를 선호했던 고려의 왕릉과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 - 효(孝)의 실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의 형태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조선왕릉은 공간의 성격에 따라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공간이므로, 동선의 처리에 있어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진입공간 - 능역의 시작 공간

진입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 또는 영)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석조물이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그 밖에 진입공간 부근에는 음양사상과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은 연지(蓮池)를 조성하였다.

제향공간 -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공간

왕릉의 후면과 좌우면에는 상록림을 조성하고 전면에는 방수림(防水林)을 식재한 사진

제향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부터 본격적으로 제향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판위(版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이다.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향·어로 중간 즈음 양 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능침공간 - 죽은 자의 공간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능침공간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 상계(上階)

초계(初階)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단이다.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경우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는 경우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능을 등지고 있는데, 보통은 네 쌍씩 배치하였으며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곽으로는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이 앉아서 노니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이 놓여져 있고, 그 좌우에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제2단: 중계(中階)

능침공간의 가운데 단이다. 중계의 가운데 8각 또는 4각의 장명등(長明燈)이 놓여져 있는데,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좌우에는 왕과 왕비를 모시는 문석인(文石人)이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제3단: 하계(下階)

능침공간의 가장 아랫단으로, 왕과 왕비를 호위하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특성상 문석인을 무석인보다 한 단 높게 배치하였으나, 영조의 원릉에서부터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무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사상

조선왕릉에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인물상과 동물상을 비롯하여 봉분의 둘레와 전면에 능주의 영혼을 위한 의식용 석물들을 배치하였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음양사상과 풍수지리를 기본으로 하여 신인(神人)과 신수(神獸), 신비한 힘을 지닌 신령한 도구와 상서로운 물건 등으로 꾸며 능실을 보호하고 왕의 영원한 안식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간절한 기원은 왕릉 주위를 장식하거나 주변에 배치된 석조 의례물의 모든 요소에 체계적으로 배어있다. 이것이 조선 왕릉 제도에서 석물의 역할로, 한국인의 내세관과 수호적 성격이 상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석물은 거의 능침공간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릉으로서 장엄함을 강조하고 주변 경관과 조형적으로도 조화를 이루어 선조(先祖)의 사후 세계를 위한 격조 높은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42능에 1300여 점의 조각이 동일한 유형으로 끊임없이 조성되었고 대부분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고유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예술미의 완전한 보존

조선왕릉의 석물조각은 한국미술사에서는 불교 조각 이외의 조각풍으로 조선시대의 역사와 조각사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정해진 규범 속에서 조선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앙과 조상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표현하였고, 현재까지 거의 훼손(도굴)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의 왕릉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과 유택에 대한 존엄성을 지켰던 덕택일 뿐 아니라, 왕릉 조성과 의식 그리고 부장품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둠으로써 도굴로 인한 훼손을 미리 방지하는 지혜가 있었다.


이러한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선왕릉 석물에 대하여 내용적인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왕릉 석물 내용적인 특성
구분 특성
배치
  • 잔디 언덕 위에 조각을 배치하여 자연경관과의 조화
  • 모든 조각을 봉분 주변에 집중시켜 화려한 공간 구성
  • 모든 배치와 조각을 대칭 구도로 하여 엄숙함 강조
  • 석수를 바깥으로 향하게 배치하여 봉분수호의 의미 강조
고유장식
  • 병풍석과 난간석 조각으로 잔디 봉분을 장식
  • 12지신상 부조를 수관인신(獸冠人身)의 형태로 병풍석에 장식
  • 혼유석이 있으며, 이를 고석으로 받쳐 공간에 띄워 놓은 형식
  • 망주석의 형태가 독특하며 세호를 장식
예술성
  • 오랜 세월에 걸쳐서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하여 하나의 형식 창조
  • 화강석의 색상과 질감으로 은은하며 신비한 분위기 창출
  • 머리를 크게 과장한 인체조각으로 능묘의 수호신상 성격 부여
  • 석호의 인상을 한국 민화의 그림과 같이 해학적으로 표현
상징성
  • 모든 부분의 석물이 고유의 상징성을 담고 있음
  • 석물의 배치를 상징에 맞게 체계적으로 배치
재료와 규모
  • 대리석, 석회암, 사암, 화산암에 비해서 영구적인 화강석 사용
  • 백성의 피해를 덜기 위해서 사람 크기로 조성하여 애민사상을 보임
역사 / 기록
  • 의궤 등을 통한 제작 과정에 대한 기록과 도상이 존재
  • 규범서, 역사서, 문집을 통한 다양한 기록 존재
보존
  • 600년 동안 두 번의 큰 전쟁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 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