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영역

조선왕릉

헌릉·인릉 이야기

제3대 태종 · 원경왕후 헌릉(獻陵)

위치 :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능의 형식 :
쌍릉
능의 조성 :
1420년(세종 2), 1422년(세종 4)
능의 구성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능역과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와 영탁을 새겼다.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2배로 석물이 많아 완벽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 밖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5개로 조선 전기의 상설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각에는 1422년(세종 4)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하여 세운 신도비가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는 소전대가 있는데, 이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전기 태조고황제의 건원릉, 신덕고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능의 역사

1420년(세종 2)에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광주 대모산에 먼저 능을 조성하였다. 원경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태종은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이후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태상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태종(太宗) 이야기

태종(재세 : 1367년 음력 5월 16일 ~ 1422년 음력 5월 10일, 재위 : 1400년 음력 11월 13일 ~ 1418년 음력 8월 8일)은 태조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왕자로서 정안군에 책봉되었다. 태종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신덕고황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고황후의 소생인 방석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태종은 1398년(태조 7)에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제 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태종은 신의고황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한다. 이 사건을 통해 태조는 둘째아들인 영안군 방과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세자 방과는 왕위에 올랐다.(정종)
그로부터 2년 후 신의고황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태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태종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회안군과 태종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다.(제 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이 사건으로 태종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회안군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태종은 그 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1405년(태종 5)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하였다. 재위기간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에는 장자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군사권을 잡고 여생을 보냈다. 그 후 1422년(세종 4)에 연화방 신궁(창경궁)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경왕후(元敬王后) 이야기

원경왕후 민씨(재세 : 1365년 음력 7월 11일 ~ 1420년 음력 7월 1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송경 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에 태종과 혼인하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 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와 군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하였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되었다.
이후 원경왕후는 1400년(정종 2)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태종 즉위 후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친족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태종은 외척세력 견제를 위하여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극심해졌다. 1418년(태종 18)에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20년(세종 2)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