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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연산군묘 이야기

제10대 연산군 · 거창군부인의 연산군묘(燕山君墓)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묘의 형식 :
쌍분
묘의 조성 :
1512년(중종 7), 1454년(단종 2)
묘의 구성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대군묘제로 조성하였다. 쌍분의 형태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묘, 오른쪽이 거창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이 있다.
같은 묘역 안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 연산군의 딸(휘순공주)와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쌍분이 조성되어 있다.

묘의 역사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유배지 강화 교동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나, 강화도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묘소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에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묘소 위쪽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1537년(중종 32)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
본래 연산군묘역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난 두 후궁의 제사를 맡게 되었는데, 한 명은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이고, 또 한 명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이다. 이 후 1449년(세종 31)에 성비 원씨가 세상을 떠나자 먼저 묘를 조성하였고, 1454년(단종 2)에 의정궁주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임영대군의 장자 오산군묘가 조성되면서 오산군파에서 묘역을 관리하였다.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묘의 이장을 요청하여 임영대군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임영대군은 거창군부인의 외할아버지로, 임영대군의 첫째사위가 거창군부인의 아버지인 신승선이 된다. 즉, 거창군부인 신씨는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 1476년 음력 11월 6일 ~ 1506년 음력 11월 6일, 재위 : 1494년 음력 12월 29일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성종에겐 첫 번째 아들이 되는 연산군은 1479년(성종 10)에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고,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년(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왕으로서의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위 3년 동안은 별 문제 없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즉위 4년째인 1498년에 무오사화(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다시 1504년에 갑자사화(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임사홍 중심의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무오사화 이 후 정사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을 폐지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가 바닥이 났으며, 잔혹한 형벌로 포악한 성정을 보여 왕으로서의 자질을 잃었다. 결국 1506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 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1506년(중종 1)에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기거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정궁주(義貞宮主 趙氏) 조씨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 ? ~ 1454년 음력 2월 8일)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 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작호를 내렸고, 1454년(단종 2) 음력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에 봉작되었다. 1501년(연산 7)에 구문경과 결혼하였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다.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세종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능양위가 되었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으며, 반정 이후 구수영이 중종에게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이혼을 주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