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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동구릉 이야기

동구릉 이야기 수릉

수릉綏陵(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합장릉
능의 조성 :
1855년(철종 6), 1890년(고종 27)
능의 구성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능의 역사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2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천장론이 거론되어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이야기

추존황제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 구름을 일으키고 연기와 안개를 토하더라 /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 능히 사해의 물을 옮기리로다.

위의 「잠룡(潛龍)」이라는 시는 문조가 세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자신을 물속에 잠긴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앞으로 강력한 군주로서 조선을 이끌어 나아갈 포부를 밝힌 듯하다. 실제로 문조는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단력 있는 정책을 펼치는 등 세도정치에 시달린 아버지 순조의 희망이었다. 한편 문조는 자주 궁궐 밖을 미행하였는데, 어느 날 북촌 자하동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에 끌려 한 집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규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함께 보는 등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훗날 박규수를 등용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조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로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둘 사이의 약속은 결국 훗날 부인인 신정익황후에 의해 실현되었다.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이야기

신정익황후 조씨(재세 : 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음력 4월 17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1830년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이후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에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수렴청정 기간에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고,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 1866년(고종 3)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에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문조(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신정익황후를 위해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지은 건물이다. 또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8폭 중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847년(헌종 13)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