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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동구릉 이야기

제1대 태조 건원릉(健元陵)

위치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
단릉
능의 조성 :
1408년(태종 8)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 및 영탁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능의 역사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인하였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定宗)에게 양위하였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