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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태릉·강릉 학술이야기

문정왕후와 보우 이야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다?

『명종실록』에는 함흥에서, 경기도 안성에서, 경상도 의성에서, 여러 지방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보고를 받은 내용이 여러 차례 올라와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기록이 나타나는 시기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시기와 일치한다. 문정왕후 승하에 관한 『명종실록』의 기사에 사신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이 다함이다.”하였으니, 윤씨(尹氏 : 문정왕후)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불교 중흥 정책을 편 문정왕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물린 이후에도 명종의 뒤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조선의 측천무후, 철의 여인 등 현세에 와서 수많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정계와 학계에서는 위 사신의 기록과 같이 문정왕후가 여인으로서 이렇게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휘두른 것에 대해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그들의 불만의 일부는 숭유억불의 시대에 그녀가 펼친 불교중흥정책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의 무석인. 큰 귀와 도톰한 입술이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보우와 부활하는 불교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당시의 유교지향정책을 무시하고 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임명하고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요량으로 봉은사 근처(정릉)에 중종의 능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산 속으로 숨어버린 조선의 불교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심한 반발을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종단 및 승과 폐지의 상소가 빗발쳤다. 요승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 정책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지원을 받은 보우는 도대선사가 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성난 유생들은 회암사로 몰려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절을 불질러 버렸다. 명종 역시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깊은 산 절로 도망친 보우를 체포하였다. 전국에서 보우를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기 시작하였고, 율곡 이이 등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이곳에서 험악한 여론을 살피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결국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