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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파주삼릉 학술이야기

한명회 이야기

공릉과 순릉에 잠든 두 자매

파주 삼릉이라고 일컫는 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과 순릉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능에 잠든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 한명회는 한강변에 별장을 짓고 '갈매기와 가까이 사귀는 정자' 라는 뜻으로 압구정(狎鷗亭)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는 현재의 지명으로 이어졌다. (1741년,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소장)

궁지기로 시작한 벼슬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에 예문관 제학 한상질의 손자이자 한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여 공신의 자손을 관리로 특채하던 문음(門蔭) 제도에 의해 38세 때인 1452년(문종 2) 궁을 지키는 일로, 다소 보잘 것 없는 경덕궁직을 맡게 되었다.

궁지기에서 일등공신으로

그가 말단관직에 간신히 올랐을 때에는 이미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나이의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이다. 이 때 그는 지인 권람 등을 이용하여 단종의 삼촌이었던 수양대군과 결탁,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차례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키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일개 궁지기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자매를 나란히 왕비로 올린 한명회

한명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슬하의 1남 4녀 중 첫째 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넷째 딸은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딸의 이른 죽음

한명회로 하여금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는 왕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의 최후

세조 이후 성종대에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해 온 한명회는 네 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록되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두 딸을 먼저 보내고 1487년(성종 18)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