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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융릉·건릉 학술이야기

융릉·건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한 왕의 능 행차 -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윤 4월 7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용영(壯勇營)의 돈 4만 냥을 경기 감영에 꿔주어 현륭원(顯隆園) 화소(火巢)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 값을 보상해주고 그 나머지로는 임금이 행차할 때 외탕고(外帑庫)의 경비 및 나무 심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1월 24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하는 도중 갈현(葛峴)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 초상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서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1월 12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현륭원을 뵈러 가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과천(果川)에서 주정(晝停)하였다. 인덕원(仁德院)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서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저녁에는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화성원행도병(華城行幸圖)의 8폭 중 일부이다. 정조는 이러한 행차를 통해 백성과 소통하였다.

아버지 장조의 원이 있는 수원 화성에 자주 행차했던 정조의 효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단순한 참배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위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정조는 능행길에서 백성들과 소통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궐 밖 행차 중에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였다. 한 번 행차마다 약 50건의 민원을 처리한 셈이다.
조선 후기의 많은 왕들이 이를 행했으나, 정조는 특히 상언과 격쟁을 처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이는 정조의 화성행차가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차가 지나가는 시흥, 과천, 화성 일대 주민들의 민정을 직접 시찰, 민원을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