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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서삼릉 학술이야기

폐비 윤씨 이야기

간택 후궁에서 왕비가 되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1455년(단종 3)에 판봉상시사를 지낸 함안부원군 윤기견과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집안이 한미했다고 알려져 있는거와는 달리 그의 할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증조부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고조부는 정순대부(正順大夫)를 역임하였고, 그의 어머니 신씨의 아버지인 신평(申枰)은 성종묘정에 배향된 신숙주(申叔舟)의 숙부가 된다.
성종보다 2살 연상이었던 윤씨는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종 2품 숙의(淑儀)가 되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성종을 모시다가, 성종 5년(1474)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476년(성종 7)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숙(貞淑)하고 신실(信實)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3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대비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투기의 죄로 폐위 된 후, 사사.

그러나 왕비가 된 윤씨는 정숙한 왕비는 아니었다. 성종의 잦은 후궁봉작으로 투기심을 느낀 윤씨는 1477년(성종 8)에 후궁 독살 혐의(처소에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된 사건)로, 성종과 대비들의 진노를 사 폐위하여 후궁으로 강등될 뻔하였으나, 궁인의 죄로 덮어 위기를 모면 하였다. 하지만, 그 2년이 지난 1479년(성종 10)에 투기심으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왕비로서의 실덕(失德)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가 끝이 아닌 1482년(성종 13)에 윤씨의 죄를 다시 의논하여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성종은 세자 연산군을 생각하여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묘비와 묘지기 2인을 배치하고,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속절(俗節)마다 제사를 허락하였다.

연산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다.

성종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오른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자신이 정현왕후의 소생이 아닌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 심한 충격을 받은 연산군은 수라(水剌)을 들지 않기도 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허락하였으며, 묘호를 올려 회묘(懷墓)라 하였다.

갑자사화, 제헌왕후로의 추존.

1504년에 척신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폐비 윤씨 사사사건을 개입시켜 정권을 장악하려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연산군의 생모추숭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이때 많은 훈구대신들과 사림들을 죽이고, 이미 죽은 대신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등의 일을 단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고, 묘호를 고쳐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이로써, 사사된 지 22년이 지나서 폐비 윤씨는 왕후로 복위되었으나, 2년 뒤인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추존된 호칭들을 모두 없애어졌다. 그 후의 폐비 윤씨의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