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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서오릉 학술이야기

홍릉 우허제 이야기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정성왕후는 13세에 시집와서 영조가 왕세제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는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배필이다. 정성왕후의 행장에 영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내 어머니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
이 행장에는 영조의 정성왕후에 대한 마음이 어떠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비어 있는 정성왕후의 옆자리

현재 서오릉에 위치하고 있는 홍릉은 처음 보는 사람 눈에 마치 덜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홍살문과 정자각, 석물과 난간석으로 둘러싼 봉분까지 나무랄 데 없는 조선왕릉의 상설을 따르고 있지만, 봉분이 곡담 한쪽으로 쏠려, 오른쪽이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홍릉은 오른쪽을 비워둔 채 쓸쓸한 단릉으로 수백 년을 이어져 왔다.

『영조실록』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승하한 해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능의 혈을 결정하면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 오른쪽을 비게 하여 정혈(正穴)을 삼도록 하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따른 것이었다.
- 3월 1일 조.

산릉도감에 명하여 홍릉의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숭릉, 명릉의 예에 의거하여 조각에 ‘십(十)’자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시하게 하였다.
- 5월 13일 조.

함께 묻힐 날을 기약했던 영조

이러한 조영을 ‘우허제(右虛制)’라고 한다.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 능을 조성할 경우, 왕이 훗날 자신도 왕비와 함께 묻히기 위하여 능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는 것을 말한다. 영조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조강지처였던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묻히길 바라면서, 홍릉을 우허제에 의거하여 조영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영조가 승하한 지 이미 2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홍릉의 옆자리는 왜 여전히 비어있을까?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한 1776년의 『정조실록』 3월 2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상소와 하교가 실려 있다.

처음 산릉을 홍릉에 정했다가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과 예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풍수상의 길지를 살펴보도록 했었다. 이에 이현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릉 위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으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의 논리는 땅속의 일이라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니, 선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중요한 관계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장릉(長陵)의 동구(洞口) 자리도 또한 먼저 정해 놓은 곳이었으니, 유독 선대왕께서 분부를 남겨 놓은 데가 아닐 수 있겠느냐?”

하고, 이현모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정조의 하교 이후 영조의 왕릉은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 내 원릉으로 결정되었고, 홍릉의 오른쪽은 영원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