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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서오릉 학술이야기

예종 이야기

해양대군에서 왕세자로 책봉되다.

예종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년) 음력 1월 15일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당시 세조는 왕이 아닌 왕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예종은 사저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후 1455년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아들로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으며, 1457년에 형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2살에 아버지가 된 예종.

1460년(세조 6년)에 한명회의 셋째 딸을 왕세자빈(장순왕후)으로 간택하였다. 이 때 예종은 11살이었고, 장순왕후는 16살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장순왕후가 원손(인성대군)을 낳았다. 즉, 예종은 12살에 아버지가 된 왕으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최연소의 나이로 아버지가 된 셈이다. 하지만 예종은 인성대군이 태어난 해에 장순왕후와 사별하고, 2년 뒤인 1463년(세조 9년)에 아들 인성대군을 잃는 비운을 겪었다..

조선 8대 임금으로 즉위, 즉위 초의 옥사

세조 즉위 말년에 이시애의 난과 여진정벌에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살의 나이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예종을 비롯한 훈구대신들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고,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왕위에 오른 예종은 남이를 관직에서 강등시켰다. 이 때 대신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하여 예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려는 모의를 했다고 고변을 하였다. 내용인 즉, 남이가 훈구세력 한명회 등을 죽이고 거사를 하려 했다는 것으로, 이의 혐의를 인정받아 남이를 비롯한 그의 해당된 세력을 역모죄로 다스렸다. 이 사건을 남이의 옥사라 하였으며, 예종은 즉위 초에 옥사로 왕권이 다소 약화되기도 하였다.

직접 시호를 정하다.

1469년에 20세의 나이로 경복궁 자미당에서 세상을 떠난 예종은 성종이 즉위 한 후 시호, 묘호, 능호, 전호를 정하게 된다. 이 때 대왕대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는 대신들에게 “예아 주상전…(睿我 主上殿…)”이라고 써져있는 조그만 종이와 함께, 예종이 생전에 ‘내가 죽은 후 마땅히 예(睿)로써 시호를 삼아야 할 것이다’라는 유교를 내렸다고 하였다. 그 후 대신들은 시호(諡號)를 ‘흠문 성무 의인 소효(欽文聖武懿仁昭孝)’, 묘호(廟號)를 ‘예종(睿宗)’, 능호(陵號)를 ‘창릉(昌陵)’, 전호(殿號)를 ‘경안전(景安殿)’이라 하였다. 이처럼 예종은 생전에 미리 묘호를 정하였으며, 왕이 직접 호칭을 정한 것은 거의 드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