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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서오릉 학술이야기

서오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명릉(明陵)을 되돌아 바라보니 송백(松柏)이 처량합니다.” 김보택의 상소 - 『숙종실록』 1703년(숙종 29) 5월 2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김보택의 상소가 실려 있다.

“전일 남구만(南九萬)의 죄를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갑술년 거조(擧措 : 갑술환국에 대한 조치)는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남구만은 전하를 믿지 않고 대륜(大倫)을 돌아보지 않으며 오직 일신의 이해화복만 헤아려서, 흰 머리의 나이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맨 먼저 성모(聖母)를 배반하고, 법을 굽혀 흉역(凶逆)을 비호하여 희적(希賊 : 희빈 장씨의 오빠)으로 하여금 세상에 살아 있게 함으로써 그 요첩(妖妾)을 조종하여 그 전일에 모해(謀害)하던 남은 꾀를 행하게 하여 화변(禍變)이 반복되게 만들었는데, 요무(妖巫)와 흉비(凶婢)의 옥사가 중전께서 승하한 뒤에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온 나라 모든 생명이 속을 썩고 뼈아파 했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화를 빗댄 김민중의 소설『사씨남정기』

(중략)
전하께서는 역적을 비호한 대신에게 무엇을 취하는 것입니까? 신이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나 지금까지 침묵한 것은, 혹시 범한 허물을 돌이켜 반성하여 힘써 사양하고 스스로 처신하여 전하의 국사(國事)를 다시 그르치지 않을 것을 기대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호서에서 경기로, 경기에서 서울로 와서 처음에는 방황하는 것처럼 하다가 끝내는 뚫고 나아가 의기양양하게 나와서 숙배(肅拜)하니 돌아보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습니다. 국법은 무시할 수 없고 여러 사람의 분노는 범할 수 없음을 다시 알지 못하여 아울러 자기의 염치도 함께 허물어뜨리고 남김이 없으니, 이것은 그들에게는 다만 작은 허물일 뿐입니다. 아! 명릉(明陵)을 되돌아 바라보니 송백(松柏)이 처량합니다. 성상의 생각이 이에 미치시면 반드시 신의 말을 망령되게 여기지 않으시고서 처치함이 있을 것입니다.”

위의 상소는, 정언 김보택이 인현왕후를 무고한 장희빈을 두둔한 소론의 남구만과 최석정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였는데,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것이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노론의 선봉이었던 김보택은 이러한 역적을 두둔한 소론의 무리를 강도 높게 비판하는 상소에서 인현왕후가 잠든 명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처연하다고 표현하였다.

김보택(金普澤, 1672~1717)

의금부판사 김진구의 아들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1695년(숙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노론의 선봉으로 소론 남구만, 최석정 등의 호역죄(護逆罪), 윤증의 배사죄(背師罪) 등을 논핵하였다. 세자시강원의 문학(文學), 보덕(輔德) 등을 거쳐, 1715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문장, 글씨, 그림에 두루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