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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선릉·정릉 학술이야기

선릉·정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일들의 귀추에 따라 다양한 세력이 부침을 겪기도 했다.

백운기를 벌하라는 상소가 기록된 『선조실록』1593년(선조 26)11월2일자의 기사

왜적과 결탁하여 왕릉을 훼손한 백운기 - 『선조실록』 1593년(선조 26년) 11월 2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위관(委官) 유성룡이 아뢰기를,
「“백운기(白雲起)가 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파헤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 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릉과 정릉은 이와 같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었다. 위의 기록은 백운기라는 자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능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에는 왕릉 능원 내의 나무 한 그루만 뽑아도 나라 밖으로 추방시키는 엄한 벌을 주었는데, 하물며 봉분과 재궁을 무참히 훼손하는데 가담하였으니, 백운기라는 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