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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동구릉 학술이야기

개경사 이야기

첫 왕릉의 재궁, 개경사

왕릉의 홍살문 밖에는 으레 재실이라는 건물이 있다. 왕릉의 재실은 왕릉을 수호하고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제관이 휴식을 취하고 제기를 관리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릉인 1대 태조의 건원릉에도 이러한 재실이 있었는데, 태종이 1408년(태종 8)에 이 재실을 개경사(開慶寺)라고 이름붙이고 조계종에 속하게 하여 왕실의 원찰로 거듭났다. 『태종실록』1408년(태종 8) 7월 29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에 귀속시켜 노비 150명과 농사지을 땅 3백결을 내렸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교가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니 시시비비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라고 하였다.

불교에 귀의했던 태조를 위한 공사

개경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졌다. 1409년(태종 9)에는 송림현 선흥사의 탑을 이 사찰로 옮겨왔으며, 1412년(태종 12)에는 경주 백률사에 있던 관음상을 이전해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개경사에 안치할 목적으로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태종실룩』1413년(태종 13) 3월 11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대장경(大藏經)』을 해인사에서 인행하게 하였다. 풍해·경기·충청도 관찰사에게 전지하여, 그 도에서 만든 경지(經紙) 2백 60속을 경상도에 체수하게 하고,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전지하기를, “지금 보내는 경지를 해인사에 전하여 대장경을 인행하라. 이 작업에 동원되는 승려 2백 명에게도 삭료를 모두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태종)이 태조가 부처를 좋아하여 일찍이 개경사를 세웠는데, 이곳에 『대장경』을 인출하여 안치하기 위해 이와 같이 명한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찰

개경사는 원래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검암산 현릉이 자리 잡은 곳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단종 때 한 차례 이 사찰의 이전 문제가 제기된 일이 있었으나 그대로 이전되지 않고 있었는데, 1779년 이전에 폐사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그 터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