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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정릉 학술이야기

정릉과 사람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정릉의 영역에 집을 지은 하륜 - 『태종실록』 1406년(태종 6) 4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전한다.

정릉(貞陵)의 영역(塋域)을 정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데도 그 영역이 너무 넓으니, 청하건대, 능에서 1백 보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짓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세력 있는 집에서 분연하게 다투어 좋은 땅을 점령하였는데, 좌정승 하륜(河崙)이 여러 사위를 거느리고 이를 선점하였다.
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 추정되는 곳에 능역을 조성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계모인 신덕왕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다.

도성 밖(현재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천장한 정릉

하륜(河崙, 1347~1416)

고려 말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훗날 태종)을 도왔다.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춘추관영사로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을 지휘하였다. 길지로 소문났던 정릉의 능역을 선점하여 자신의 집을 세웠으니,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