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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태릉·강릉 학술이야기

봉은사 이야기

도심 속에 연등을 밝히는 봉은사

매년 음력 4월 8일, 도심 한복판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내걸려 장관을 연출한다. 이는 삼성동에 위치한 사찰 봉은사에서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하게 여는 연등 축제의 한 장면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옛 사찰들은 모두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깊은 산줄기에 위치한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근처에는 남아있는 사찰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봉은사는 어떻게 이렇게 도성 가까이에서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것일까?

신라 왕실의 원찰이었던 봉은사

봉은사는 794년(신라 원성왕 10) 연회국사가 왕실의 원찰로 창건하였으며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8 「잡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사천왕사, 봉선사, 감은사 등과 더불어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성전사원이란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를 포함하는 사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조선 성종 선릉의 원찰이 된 봉은사

오랜 역사를 지닌 왕실의 원찰 견성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봉은사로 개칭하게 되었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이 잠들어 있는 선릉을 위하여 사찰을 중창하고 봉은사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후 1562년(명종 17)에는 그 위치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보우

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재위 시, 스스로를 조선의 여주(女主)로 칭할 만큼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는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문정왕후는 조선왕실의 숭유억불 정책을 따르지 않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승려 보우(普愚)를 만나 봉은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봉은사를 조선 불교 중흥의 장으로 삼았다. 폐지되었던 승과시(僧科試 : 승려들에게 실시하는 과거시험)가 부활하여 이곳 봉은사에서 치러졌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바로 이곳에서 등과하였다..

꾸준히 이어온 봉은사의 명맥

봉은사를 중심으로 한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책에는 조정과 유생의 반발이 컸다.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유생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봉은사 주지인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당하여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문정왕후의 불교를 중흥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봉은사는 병자호란 때 불탔으나 숙종 때에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여 여전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