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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가 능비교

비교분석

세계 대부분의 민족은 왕릉을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소중히 보존해 오고 있으며 그 중에는 피라미드, 중국의 명청릉, 베트남 Hue Monuments 등과 같이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도 적지 않다. 다만 각 지역의 왕릉들은 각각의 왕릉이 지어진 시대적 조건 또는 문화적 여건에 따라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진시황릉처럼 고대 사회의 산물로 조성된 것이 있는가 하면, 이슬람문화권의 무덤처럼 종교적인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으며, 그 밖에도 각 민족이 갖고 있는 고유한 문화배경에서 형성된 것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 자신이 신격화되어 거대한 무덤을 조성한 사례가 될 것이며 부하라에 있는 이스마일무덤(Tomb of Ismail)이나 술탄 산자르의 능묘(Mausoleum of Sultan Sanjar)는 이슬람 문화가 만들어 낸 독특한 사례이다.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무덤은 지역의 교회당과 불가분의 존재이며 힌두 문화권에서는 별도로 무덤을 만드는 대신에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어 시신을 화장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힌두교와 유사한 전통을 갖고 있다.

이 가운데 동아시아, 즉 중국이나 한국, 일본, 베트남의 왕릉은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서로 공통되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 유교는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있거나 특정한 신앙의 대상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더라도 그 자손이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계승되고 이어진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는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것이고 또 자손에 의해 먼 미래에까지 이어진다는 신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근원인 조상은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며 조상에 대한 기억과 존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때 조상의 존재를 가장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조상의 무덤이다. 이런 이유로 유교 문화권에서 조상의 무덤은 다른 어떤 것에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왕에 의해 통치되어 오던 전통사회에서 무덤 가운데도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왕릉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왕릉은 공통되는 보편적 가치와 함께 다른 문화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국 명·청릉과의 비교

한국의 조선시대는 중국의 명·청대에 해당된다. 중국의 명 13릉과 청동릉, 청서릉을 조선왕릉과 비교하여 보면 몇 가지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첫째, 한국과 중국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지배하였던 유교 예제에 따라 남향을 선호하였으나, 한국적인 풍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왕릉은 반드시 능침을 남향하도록 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시대의 왕릉은 배산임수한 지형의 산기슭에 능원을 구축하여 좌우로 산세가 위요하도록 하였지만, 능침 뒤의 조산과 능침 앞의 안산을 봉분 및 시설물과 일직선 축을 이루도록 배치하지 않고 자연 지세에 맞추어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중국과 구분된다.

둘째, 시신을 모시는 공간을 조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국은 지하에 궁전을 연상하게 하는 큰 내부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관을 안치한데 비해, 조선왕릉은 중국과 같은 지하궁전을 조성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관을 안치할 공간만 조성한 점에서 중국과 구분된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왕릉은 도굴되지 않고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셋째, 능의 구성과 주변 환경 처리방식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왕릉은 봉분을 조성하는 것만이 기존지형을 약간 변화시킬 뿐이며 그 이외에는 기존의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능역구성을 마친다. 중국 능의 봉분은 높이가 수십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조성된데 비해, 조선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불과 3∼5미터에 불과해 자연친화적으로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왕릉 능침의 크기의 관점에서 중국과 비교해 볼 때 건조물과 자연환경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 양국 간 자연관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넷째, 조선왕릉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봉분이며 그러한 봉분의 중심성은 능역 전체의 배치계획과 시각적 경험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중국 청대 황릉의 경우 봉분이 어디에 있는지 밖에서 조망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고 봉분 주위를 벽돌로 쌓아올린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릉은 능침을 신성시하고 보호하는 상징적 의미를 중국과 달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왕릉의 봉분 중심적 태도는 한반도의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써 봉분형식 자체가 한국 고유의 전통적 가치관임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 조선왕릉에서의 건축물은 능역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물, 제사를 드리기 위한 장소제공, 제사준비와 관리에 필요한 공간 설비,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 정도의 최소한의 건조물에 국한된다. 그 건조물들은 기능적 필요에 따른 것이며 건축물 자체를 크게 해서 강조하려는 의도는 최소화 시킨 것이다. 배치 또한 중국과 같이 엄격한 좌우대칭을 따르지 않는다. 규모, 장식 등의 측면에서도 중국보다 매우 간소하고 소박하며 과도한 치장을 절제하였다.

여섯째, 중국의 석물과 조선왕릉의 석물을 비교해보면, 기본적인 형태와 목적은 유사하지만 석물이 설치된 주변 환경, 작품의 크기, 재료, 인상, 세부 표현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은 거대한 크기와 사실적인 조각으로 위압감을 주는데 반해, 조선왕릉의 석물은 잔디 언덕에 독립해서 높게 설치하고 단순화된 화강석 조각 형태 및 색상으로 인해 은은하며 엄숙한 수호신상적 목적이 잘 구현되어 있다. 특히 석인상의 경우 중국과 비교해 볼 때 몸에 비해 큰 머리의 비례를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사각 기둥의 느낌이 나도록 형태를 단순화시켰다. 이는 의례용 석물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성과 예술성이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일곱째, 조선왕릉의 공간구성은 뒤의 봉분과 그 앞의 평평한 외부공간으로 구성되며, 자연환경이 만드는 장소에 대한 느낌(Sense of place) 자체가 중요한 왕릉의 가치가 될 수 있다. 중국 명청 시대 능침의 장소감은 조선왕릉과 사뭇 다르다. 중국 능은 건물로 둘러싸여진 인공적 중정들이 주류를 이루어 능침이 자연의 주인이 되도록 느끼게 한다. 이것은 조선왕릉과는 완연하게 다른 것으로써, 능 조성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추구하였는가에 대한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많은 경우 조선왕릉의 장소적 느낌은 자연지형에 의해 형성된 외부공간이지만 밝고 평온하며 안정적이고 시각적으로 균형 잡혀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인공적 건조물에 의해 조성된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자연환경 자체가 갖고 있는 자리에서 오게 된다.

여덟째, 능침제도가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묘에 참배하고 제사지내게 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 한다면, 중국 명·청 시기의 능침은 현재 그 기능이 사라진 반면, 조선시대의 능침에는 아직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정례적으로 능제가 행해지고 있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태묘가 현재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는 현재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이렇듯 중국과의 차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의 생사에 대한 이해방식 그리고 유교적 의례의 공간적 처리에 대한 주관적 해석 등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고유한 정신적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볼 때 조선왕릉은 단순하면서도 부드럽고 과장되지 않은 인간미가 느껴지며 인공적 처리보다 자연질서 자체에 귀의하려는 한국적 취향이 느껴진다. 이렇듯 분위기 형성과 능 조성방식이 중국과 사뭇 다르다는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한국의 능만이 고유한 분위기와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릉은 그러한 한국 능의 가장 전형적이고 수준 높은 성취를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조선왕릉은 그 물리적 형식, 현장에서의 심리적 느낌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정신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산임을 드러내준다.

일본 천황릉과의 비교

일본에서 황실은 화장법을 따르지 않고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화장을 하고 수습된 유골이나 재, 치아, 머리카락 등을 모시기도 하였다. 천황의 매장시설로 고분이 만들어진 시대는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약 400년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전방후원분, 원분, 방분 등 여러가지 형태의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사카에 위치한 5세기 중반~후반에 만들어진 닌토쿠 천황릉으로, 천황릉 중 최대 규모이며 세계3대 능묘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면서 천황릉은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형태도 반구형의 단순한 분묘 형태로 바뀌는 등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고분이 쇠퇴하고 석탑 등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일본의 천황릉은 천황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19세기말에 와서야 봉분을 조성하는 고분 형태의 능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일본 천황릉은 봉분을 네모난 울타리로 둘러싸고 그 앞으로 의례를 위한 넓은 단을 갖추고 길게 진입부를 배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분구가 위치한 곳은 구릉지가 약간 돌출한 부분이 많은 편이지만 지형에 따라서 예외적인 경우가 허다해, 조선왕릉이 특정한 풍수적 조건을 고려해 왕릉의 입지를 선정하였던 것과 구분된다. 또한 일본 능묘의 경우 제사를 대비한 별도의 제례용 건물이나 봉분을 수호하는 석조 조각물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도 조선왕릉과의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일본 황실의 경우 7세기 이후 1천년 가까운 기간 동안 불교전통이 강하게 작용하여 고분 형태의 능이 지속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왕릉은 5백년 이상의 왕조 역사를 통해 일관된 원칙 아래 왕릉 조영이 지속되었다는 점이 차이점으로 두드러진다.

베트남 응우엔 왕조의 능과의 비교

베트남은 오랜 왕조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왕릉 유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는 것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가 대표적이다. 응우엔 왕조는 19세기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비교적 짧은 수명의 왕조로, 7기의 왕릉이 있다. 이는 후에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후에시의 도성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응우엔 왕조의 황제릉은 중국의 능침제도를 많은 부분 수용하였다. 중국과 베트남의 왕릉이 왕이 사후에도 계속적인 통치를 하도록 한 능원 조영이었다면, 조선시대의 왕릉은 예를 갖추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응우엔 왕조의 능은 제일 밖에 홍문을 만들고 문 안 넓은 마당 좌우에 석인상과 동물상을 늘어서있게 했다. 그리고 봉분은 보성이 둘러싸도록 배치하였다. 다만 베트남은 전체 능역이 중국에 비해 작고 석물의 크기도 작은 편이며, 침전이나 명루, 보성 역시 규모 면에서 중국의 것보다 작다. 그러나 배치 구성 측면에서는 중국과 차이를 보인다. 중국의 능침제도가 1개의 축 상에 주요 시설들이 배치되는 형식이었다면, 응우엔 왕조의 능은 역대 왕에 따라 축의 수 변화가 다양하여 능의 공간구성방식이 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응우엔 왕조는 능의 입구나 보성의 전면에 호수를 두고 돌아가도록 하거나 다리를 두어 건너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호수는 조선왕릉의 능을 감싸면서 흐르는 명당수와 비교되며, 이는 조선왕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능으로 들어가는 신성함과 경건함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능 앞의 석인석을 비교해보면, 한국과 중국, 베트남은 기본적인 형태와 목적은 유사하지만 각 나라별로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이는 작품이 설치된 주변 환경, 작품의 크기, 재료, 인상, 세부 표현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중국은 거대한 크기와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적이라면, 베트남은 크기가 작고 뜰에 배치되어 있어 조각 장식품처럼 보인다. 이에 비하여 조선왕조의 석물은 잔디 언덕에 독립해서 높게 설치되어 야외조각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며, 단순화된 형태와 화강석의 색상으로 인하여 은은하며 엄숙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특히 석인석의 경우 사각기둥 형태와 몸에 비해 큰 머리의 비례로 장엄미가 잘 나타나고 있다.

각 국의 문석인 비교
각 국의 문석인 비교
구분 명13릉 청동릉 베트남 조선왕릉
사진 명13릉 문석인 형태 청동릉 문석인 형태 베트남 문석인 형태 조선왕릉 문석인 형태
국가 중국 중국 베트남 한국
소재지 북경시 창평구 천수산 하북성 준화현 창서산 베트남 후에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제작시기 1409 1661 1841~43 1562
재료 대리석 대리석 대리석 화강석
지료경도 Mohs 3-4(방해석) 3-4(방해석) 3-4(방해석) 7(석영)
크기 약 3m 약 3m 약 1.6m 약 3.2m
형태 양관을 쓰고 홀을 든 직립상 관복을 입고 배에 손을 댐 관복에 홀을 들고 포를 입음 복두를 쓰고 홀을 든 직립상

위에서 보았듯이 유교문화권의 무덤은 커다란 봉분을 형성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봉분은 흙을 반원형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다만 이 봉분을 만들고 나서 그 주변부의 시설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은 각 나라 각 민족의 고유한 자연관과 세계관에 의해 달라졌다.

조선의 왕릉은 지하묘실을 두지 않고 봉분 속에는 시신을 안치한 관만 매장하였지만, 지상의 구조물들에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조선왕릉은 중국처럼 한두 곳의 특정 지역에 집중해서 족분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풍수이론상 좋다고 평가되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각각의 능은 풍수 이론에 의해 능을 감싸는 언덕을 보유하고 있다. 각 능은 봉분을 둘러싸고 능을 지키는 짐승과 관리들의 모습이 돌로 새겨져 봉분 주위에 배열되며, 능에서 치르는 제사에 대비한 정자각, 재실 등의 건축물들도 일정한 규칙에 의해 배치된다. 여기에는 한국인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쌓아온 미의식과 자연과 조화된 건축물을 만들려고 하는 독특한 가치관이 뚜렷이 나타나있다.

또한 한국은 유교가 지배층에서부터 사회 기층에까지 철저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무덤에 대해 종교적인 차원과 유사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왔다. 따라서 최고 지배자인 왕들의 무덤 뿐 아니라 조상의 무덤이 각별한 존중을 받아왔으며,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서도 무덤은 하나의 신앙처럼 소중히 취급되었다. 현재까지도 한국인에게 있어서 부모는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며 조상의 무덤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대상물이 되어 있다. 한국의 수많은 무덤 가운데도 가장 뛰어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왕조의 왕릉으로, 유교가 정치, 사회적으로 최고의 덕목으로 수용되어 온 조선왕조에서 최고 통치자인 왕들의 무덤은 최고의 존경을 받는 대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조선왕릉은 유교문화권에서도 높은 문화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